18.
[제미나이가 만들어준 이미지입니다]
나는 휴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소변이 급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데 등 뒤에서 부산한 발소리가 들렸다.
"작가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재건이 들뜬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활짝 펴고 자신만만하게 걸었는데, 오히려 그런 모습이 품위를 더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어딘가에 부딪혀야만 멈출 것 같은 그의 돌진성 워킹에, 나는 위협을 느껴 뒤로 조금 물러섰다. 그러자 그는 안심하라는 듯 걸음을 멈추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반갑습니다. 차누아르입니다."
"아, 네."
"한태윤 작가님 맞죠?"
"네."
"혹시 나이가...?"
어휴, 나는 절로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재빨리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그의 짙은 갈매기 눈썹을 보며 생각했다. 눈을 맞출 자신은 없었다.
'이렇게 또 난관이 시작되는구나. 루저 인생, 신상 따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뭐, 비슷한 나이로 보였겠지. 그래서 말 걸고 싶었겠지. 그렇다고 그걸 꼭 알아야 속이 시원하겠냐? 나야 당신 소개할 때 들어서 알게 됐지만, 내가 원한 게 아니었잖아. 나는 저쪽 나이 아는데 숨기기도 뭣하고... 대체 왜 이렇게 적극적인 거야? 그래. 동갑이다, 인마.'
"스물여섯입니다." 나는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와우! 동갑이네요."
그는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꼿꼿이 펴져 있던 그의 흉곽이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그 바람에 감추어져 있던 그의 거북목이 쑤욱 튀어나왔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더 부담스러웠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뺐다. 남자 손을 오래 잡고 싶진 않았다. 그때 키 작은 남자가 팔자걸음으로 다가왔다. 구진이었다.
"어잇! 담배들 안 피는교?"
그의 건들거리는 말투에, 재건은 정색하며 대꾸했다.
"저희 담배 안 핍니다."
구진은 말 대신 손과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하고,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건은 만족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담배 안 피죠?"
"네. 저 근데 화장실 좀."
나는 급히 화장실로 갔다. 그도 따라왔다. 나는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소변기에 섰다. 소변기가 세 개였기에 중간을 비워 물리적으로 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내 옆 소변기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도대체 왜? 왜 이렇게 적극적인 거지? 이 인간은 코로나 시절 사회적 거리 두기는 어떻게 견딘 거야?
나는 그의 반대편으로 몸을 비틀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뜨거운 시선을 원천 차단했다. 역시나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대각선 아래 방향으로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나의 철통 방어는 뚫지 못했다.
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기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더니 소변기에 침도 뱉었다. 오줌발은 왜 그리도 센 건지... 그냥, 그의 모든 것이 거슬렸다.
볼일은 마친 나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는 내 뒤에 서서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나는 그를 보았고, 그도 나를 보았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 처음으로 눈을 맞췄다. 그는 치명적인 쾌남인 척,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루이틀 연습한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그가 거울 속 날 보며 말했다.
"오늘 끝나고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전 술 못 마시는데요."
"아... 그래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상당히 아쉬워했다.
"술은 안 마셔도 되니까 괜찮으면 식사나 하시죠? 글에 관한 얘기도 나눌 겸."
나는 답변을 못 하고 세면대에서 물러섰다. 이번에는 그가 손을 씻었다.
건조기에 손을 가져갔다. 시끄러운 기계 소음과 함께 온풍이 불었다. 나는 손에 묻은 물기가 다 흩어질 때까지 한참을 말렸지만, 여전히 그에게 전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건조기에서 비키자, 그가 손을 말렸다. 나는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답변을 안 하고 벗어나면, 그를 무시하는 꼴이 될 것이다. 내가 망설이고 있자, 그가 한 번 더 말했다.
"다이어트 중이면 밥 안 먹어도 되고요. 어디 앉아서 커피나 한잔하든지, 것도 아니면 마실 거 테이크아웃해서 유령처럼 떠돌던지. 뭐가 됐든 얘기하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그의 단계적 제안에, 나는 빠져나갈 길을 잃었다. 술, 밥, 커피, 유령. 이 중 하나는 택해야 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끼리 마주 보고 밥 먹는 기억은 뇌리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카페도 마찬가지. 차라리 얼굴 안 보고 걸으면서 대화하는 게 제일 낫겠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
나는 결심을 굳히고 대답했다.
"그럼 떠돕시다. 유령처럼."
"그럽시다. 난 뭐든 좋습니다. 아, 먼저 들어가도 됩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내 들어 보였다.
"담배 안 핀다면서요?"
"전담은 담배 아닙니다. 중독성 없어요."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전자담배 기기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대변기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곧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화장실 천장을 부유하는 옅은 담배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
재건은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몸이 굳었다. 구원의 뒷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재건이 작년에 과제로 제출했던 시나리오 주인공을 현실로 불러낸 것 같았다. 그는 시나리오 초반에 여주인공의 얼굴과 몸매를 상세하게 묘사해 적어놓았다. 그걸 읽은 교수가 말했다.
시나리오 지문에 시각 정보 묘사를 하는 건 좋다. 하지만 이건 너무 적나라하다. 신체 묘사를 왜 이렇게까지 했나? 누가 봐도 노골적인 메시지 아닌가? 여성 캐릭터를 성적 대상화 한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거의 포르노그라피 아닌가?
이런 신체 묘사는 어덜트 비디오 대본에나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나? 작가가 쓰다가 흥분해서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데. 자네 너무 과몰입한 거 아닌가?
내 누차 말했지. 좀 차분해지라고. 자네는 늘 들떠 있어. 물론, 다른 학생들보다 결과물이 많은 건 인정하네. 그래서 자네에게 기대되는 것도 있고. 하지만 자네 이야기는 일회적이고 소모적이야. 오래 기억될 이야기가 아닐세.
자네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재능이 있네. 그런데 그 향이 너무 강해서 수분을 도울 매개자가 접근할 수가 없어. 결국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말라죽을 걸세.
마음을 울릴 글을 쓰려면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무력감도 경험해 봐야 하네. 흥분과 열정만 가지고 작업하면 딱 그만큼의 결과물만 나올 뿐이야. 내 말 이해하겠나?
이날의 면담 이후, 재건은 대본을 쓸 때 불필요한 묘사는 철저히 솎아 냈다. 그렇기에 지금 구원을 보면서도 그녀의 신체를 묘사할 언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축약된 단어들만 떠올랐다.
죽인다. 섹시하다. 모델이 따로 없네. 그의 마음 안에서 묘사는 죽고, 본능만 살아 꿈틀댔다.
그는 구원이 여자 화장실 입구를 통과해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쳐다봤다. 내면의 원초성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녀가 나오면 말을 걸자. 모든 사랑은 말에서 출발해 말로 끝난다. 언어라는 그물망을 펼쳐야지만 행위도 낚을 수 있다. 시간이 없다. 휴식 시간은 곧 끝난다. 이 찰나의 마주침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녀를 낚을 미끼로는 뭐가 좋을까?
재건은 그녀가 자기소개 때 했던 말을 떠올리기 위해, 그에게는 결핍된 차분함의 시간에 도전했다.
눈을 감았다, 아직이다.
바닥에 앉았다, 아직이다.
귀도 막았다, 이제야 생각을 좀 할 수 있게 됐다.
그의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자기 것을 제한, 오롯이 타인에 관한 것을 기억해 내려 하자, 그는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