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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향기, 그림자

19.

by 김빗


"사이비, 마귀. 사이비, 마귀. 사이비, 마귀."

재건은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이 말을 반복해서 중얼댔다. 구원이 한 얘기 중 사이비 종교와 마귀 퇴치만 생각났기 때문이다. 혼내느니 마느니 하는 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니 구원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도 자기를 보고 있자,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고 마음속으로 자축했다.


구원은 웬 남자가 퍼질러 앉아 있자, 반대편 벽으로 바짝 붙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혹시 모를 재난에 대비해 각별히 주시하며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벌떡 일어서서 자기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걸음을 빨리해 지나쳐 가려했다.


"여기서 다 뵙네요. 이런 우연이."

재건은 썩은 멘트를 날린 후, 거울을 보며 수없이 연습한 쾌남 미소를 시전했다. 당당하게 벌린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고르게 맞물려 있었다. 자신이 건치 보유자임을 자연스럽게 어필하는 것이다. 그는 동공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한 후, 자신감과 여유를 불어넣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치명적 미소의 완성이었다.

그는 어깨를 과도하게 펴는 바람에 상체가 여성처럼 돌출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녀를 맞이했다.

구원이 그를 피해 돌아갔다. 다급해진 그는 힘겹게 유지하던 살인 미소를 해제하고 닫힌 치아를 열었다. 윗니와 아랫니가 벌어지며 꾸덕한 침 기둥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익스큐즈 미!"

그의 외침에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봤다.

"왜...?"
"하하하, 거절에 능하시군요."
"예?"
"오... 인상을 써도 아름답습니다."

구원은 작게 한숨 쉬며 돌아섰다. 그러자 재건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뿌리치며 몸을 홱 돌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무슨 얘기요?"
"바로, 당신에 관한 이야기."

그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자,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제가 만만해요?"
"아뇨."
"당신보다 어려 보이니까 쉽게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 같은데 착각하지 마세요. 다른 데서도 이래요? 본인보다 어리거나 약해 보이면 함부로 대하세요?"
"그런 거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구만. 뭘 원해서 이러는 건데요? 사람들 착취하고 가지고 놀고 싶어요?"
"아니요, 전 그냥 예뻐서..."
"지랄하지 마세요. 당신 같은 인간 뻔하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여자만 보이면 쑤셔대고, 그러다 한 명 얻어걸리면 살살 구슬려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빨아먹고, 여자가 조금이라도 불만 제기하면 자기 못 믿는다고 성질내고, 여자가 싹싹 빌 때까지 나쁜 년으로 몰아가고, 무릎 꿇렸다 싶으면 또 이용해 처먹고. 사람이세요? 어디 가서 이런 짓 하지 마세요.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온갖 사회 문제가 발생한다고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재건은 결국 못 참고 폭발했다.

"미쳤나 이게. 뭐 하는 인간이야."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하는 거 보니 제 생각이 맞네요.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요? 못 배웠어요?"

재건은 소리 지를 뻔했지만 겨우 참아내고 화장실로 갔다. 그는 분을 못 이겨 자기 머리를 두들겼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욕도 내뱉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걸음이 느려지고 휘청이기도 했다. 그는 화장실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쉰 후 담배를 피웠다.

물론 자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잘못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이 상황이 그렇게나 모욕당할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여자 마음은 알 수가 없다. 자기소개할 때는 그렇게 얌전해 보이더니, 나한텐 왜 이러는 거지? 내가 만만한가?'

자괴감에 빠진 그는 창문 밖으로 꽁초를 던지며 한 번 더 욕설을 뱉었다.


*


건물 밖으로 나온 구진은 구석진 그늘로 가 담배를 피웠다. 요즘은 길에서 담배 피우면 노려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적잖이 눈치가 보였다. 그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다시는 사고 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시비가 붙어도 예전처럼 끝까지 싸우지 않고, 먼저 사과하거나 자리를 피했다.

휴식 시간이 10분이라 했으니, 앉아 있다가 한 대 더 피우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는 폰으로 쇼츠 영상을 보며 실실거렸다. 그 순간, 화면이 어두운 색으로 전환되며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표정이 바뀌었다. 눈을 찡그리며 받을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전화가 끊겼지만, 곧바로 다시 울렸다. 그는 에이씨,라고 읊조리며 전화를 받았다.

"와요."
"와요?"
"갱생해서 잘살아 볼라 하는 사람, 와 또 괴롭히는교."
"괴롭히기는, 니 진짜 손 씻었나?"
"아이고 형사님. 요즘 현금 가진 사람이 어딨습니까? 다 카드 쓰고, 페인가 뭐시긴가 쓰고 하지."
"알았다. 일은 잘하고 있나?"
"덕분에요. 밤이슬 맞으면서 열심히 뜁니다."
"잘했다. 니 지금 어디고?"
"뭐 좀 배우러 왔습니다."
"뭘 배워?"
"지는 뭐 배우면 안 됩니까? 드럽게 무시하시네. 글쓰기 배우러 왔습니다."
"네가 글을 쓴다고?"
"아따 마, 고마 좀 무시하이소. 글쓰기 배아가 그동안 내 괴롭힜던 인간들 처 죽일라고 그랍니다. 됐으요?"
"새끼가... 죽이긴 뭘 죽여."
"진짜로 죽일 수는 없잖아요. 빵에 있을 때 상담사가 분노를 글로 써보면 도움 된다 캐서 해보는 겁니다."
"진짜제?"
"좀 믿으이소."
"그래, 믿는다. 니 혹시 정 사장 연락하나?"
"정 사장? 아, 그 장물아비 새끼요? 금마 연락 안 한 지 꽤 됐는데. 와요? 사고 쳤으요?"
"진짜 연락 안 하나? 니 친하잖아."
"친하긴 뭘 친해요. 업무 때메 본 거지."
"어쨌든 잘 알잖아. 금마 은신처 같은 데 모르나?"
"그 새끼는 종횡무진이라 알 수가 없는데. 한국에 없을 수도 있어요. 일본 혼혈이라 열도 어디에 짱박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즈그 애비한테 끌리가서 포경선 타고 있을 수도 있고. 찾기 어려울 긴데."
"확실하나? 한국에 없단 말이가?"
"있을 수 있죠. 애미가 한국 사람이니까. 지 새끼 어디 숨겨 놨을 수도 있지."
"엄마는 어디 사노? 엄마에 대해 좀 아나?"
"가 엄마가 맥양집 작부 출신 아이요. 애비가 손님으로 왔다가 정 사장 만들었지. 정 사장이 어릴 땐 일본에서 살았는데, 애비가 하도 뚜들겨 패서 나이 좀 먹고 한국 엄마한테로 토끼쓰요. 뭐 그 새끼나 내나, 우리 같은 인간들은 어린 시절이 참 좆같지. 근데 와 옛날 생각나게 만드는교. 기분 드릅구로 진짜."
"생각은 니가 한 거지. 아무튼 니 지금 서로 좀 온나. 급하다."
"못 갑니다. 수업 왔다니깐요."
"행님이 니 오도바이 싸게 살 수 있게 용써준 거 벌써 까먹었나? 섭섭하게 이랄 끼가?"
"아이고 행님요. 지 같은 잡범한테 손 벌리는 거 보이 똥줄 많이 타는 갑네요."
"시끄럽고, 올 기가 안 올 기가?"
"에이씨, 알았어요. 거마비 넉넉히 챙겨주이소."
"그래, 일단 온나."


형사가 전화를 끊자, 구진은 담배를 피워 물고 오토바이가 세워진 곳으로 갔다. 우미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가 구진이 통화하는 것을 들었다. 목소리가 작긴 했지만, 내용은 다 들렸다.

구진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왔다. 그가 헬멧을 안 쓰고 있자 우미는 불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오토바이가 서더니 그가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쌤요. 내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됩니더."
"무슨 일요? 어디 가길래요?"

우미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어봤다.

"고래 잡으러 갑니더."
"고래요?"
"예. 튈라는 게 아니고예, 지가 법자라 군대를 안 가서 고래를 못 잡았으예. 제 가방하고 그 자료, 강의 계획서 좀 던져 주이소."

우미는 고개를 돌려 구진이 앉았던 책상을 확인했다. 바닥에 그의 가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 자료를 넣어 창문으로 갔다.

"제가 들고 내려갈게요."
"그냥 던지이소. 서로 불편하게 와 이랍니까."
"어떻게 던져요. 잠시만 기다려요, 내려갈 테니까."
"괜찮습니더. 시간 없으니까 마 던지이소."

화장실에서 화를 삭이고 온 재건은 이 상황을 보고 있다가 우미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주세요. 제가 던질게요."

그는 우미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창문 밖으로 던졌다. 던지는 순간 소리가 안 나도록 입술만 움직여 욕했다. 태윤은 그의 입을 보고 욕이란 걸 알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가 구진을 싫어하는 게 느껴졌다.

구진은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우러 가며 재건에게 외쳤다.

"탱큐 누아러, 건필하이소!"

구진이 가방을 줍자 우미가 물었다.

"헬멧 없어요?"
"있습니다."
"써요. 방금 그냥 가려고 했잖아요."
"고맙습니다, 쌤. 담 주에 보입시더."
"필명은 없어요?"
"필명 있죠. 사신!"

구진이 헬멧을 쓰고 떠났다. 우미는 창문을 닫으려다가 잠시 거리를 보았다. 수업 전에 비해 햇살이 은은해졌고, 그림자는 길어져 있었다. 시간을 보니 4시 10분이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었다.

구진이 빠졌지만, 아직 소개를 안 한 수강생이 두 명 더 있었다. 40대 여성과 50대 남성이었다. 우미는 그들과도 길게 인사 나누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차후 진행될 수업 방향과 과제 얘기도 해야 했다. 두 수강생은 필명과 쓰고 싶은 이야기만 간단히 듣고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알아갈 시간은 앞으로도 충분하니 말이다.

그나저나 필명이 사신이라니. 참 구진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실제로 죽일 수 없으니, 글로라도 죽여야지. 그래야 살지.

우미는 오늘 강의가 끝난 후, 구진의 참석 여부를 두고 센터장과 의논하려 했다. 그런데 그와 형사의 통화를 듣고는 함께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랐을 땐 두려웠지만, 알고 나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태도는 자신을 지키려는 행동일 수 있었다.

구진은 그의 삶에서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경험한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좋은 건지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에게 관계란, 공격하는 대상과 공격받는 대상이라는 이분법으로 구획 지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 수준의 배려를 기대하는 건 매우 사적인 욕망이다. 그는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앞으로 쓰게 될 글을 통해 양지의 온기를 알려주면 된다.
죽이지 않고도 복수할 수 있고, 화내지 않고도 관계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면 된다.


우미는 남편과 딸, 시댁 식구들을 글에 등장시킨 적이 있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름은 바꾸면 되고, 사건은 각색하면 되니까. 사실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묻힌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정말로 괜찮을 줄 알았다.


그녀는 옛 생각이 나자 한없이 약해짐을 느꼈다.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기 위해 생각했다.

지금 나는 여기에 있지, 그곳에 있지 않다. 그들은 사라진 사람들이고,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헛된 감상에 빠지지 말자.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이 사람들이니까.


그녀는 사람들을 보며 애써 웃어 보였다.

몇몇 수강생이 따라 웃어주었다.


다행이다. 나를 보며 웃어주는 사람도 있어서.




[제미나이가 만들어준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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