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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향기, 그림자

21.

by 김빗


수강생들이 하나둘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태윤은 사람들 눈치를 보며 모두가 나갈 때까지 머뭇거렸다. 덩달아 재건도 강의실에 남게 됐다. 그는 태윤이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가 원형으로 배치된 책상에 눈길이 갔다. 그는 손바닥으로 책상 하나를 톡 치며 말했다.

"아하! 이것 때문이었구먼."

그때 화장실에 갔던 우미가 돌아왔다. 그녀는 멀뚱히 서 있는 두 남자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안 가고 뭐 하세요?"
"선생님! 책상 원위치시키면 되죠?"
"아... 책상 때문에 안 간 거예요?"
"당연하죠!"

재건은 거짓말일지언정 씩씩하게 대답했다. 우미는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가 해도 되는데... 도와주시면 고맙죠."
"넵!"

그는 우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기 앞 책상을 들어서 옮겼다. 태윤도 부랴부랴 동참했다. 우미가 첫 줄에 책상 두 개로 기준을 잡자, 둘은 열을 맞추어 차례차례 책상을 놓았다. 강의실이 얼추 정리되자 우미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는 사무실 냉장고에서 제로 콜라 세 개를 꺼내어 가져왔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마시고 가요."

세 사람은 얼떨결에 마주 보고 앉아 음료를 마셨다. 두 남자가 콜라를 한 모금씩 들이켜자 우미가 물었다.

"오늘 어땠어요?"
"좋았습니다! 하하하."

재건은 복도에서 받은 치욕은 그새 잊었는지, 자동 반사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에게 말이란 일단 내뱉고 보는 자기 쾌락적 표현법이었다. 말에 담긴 진심이나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점은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쾌활을 이식받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제미나이가 만들어준 이미지입니다]



우미는 재건의 능청스러움에 웃음이 났다. 태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콜라 캔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우미는 웃지 않는 태윤에게 물었다.

"태윤 작가님은 수업 어땠어요?"
"아 네. 저는... 죄송합니다."

그의 뜬금없는 사과에 우미와 재건의 눈이 커졌다.

"뭐가 죄송해요?"
"다들 필명 준비해 왔는데 저만 안 해서요."
"괜찮아요. 원치 않으면 필명 안 써도 된다고 공지했잖아요."
"그래도 저만 너무 무성의한 것 같아서요. 자기소개할 때도 멍 때려서..."

우미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그러나 태윤은 그녀가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저는 수업 들을 준비가 안 된 것 같은데, 혹시 대기 인원 있으면 그분께 기회를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미는 그의 말이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끝난 것에 주목했다.
'좋겠다'가 아니라, '좋지 않을까요'다. '확신 없음'이라는 자기 불안을 전가하여 그녀가 확신을 심어주길 유도하는 것이다.

우미는 태윤의 대화법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이 고민을 해결해 주면, 그는 평생 혼자 설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그를 응원하며 같이 해보자고 하면, 당장의 불안은 해소될지 몰라도 도돌이표 삶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표면적 질문에 동조하여, 대기 인원에게 기회를 줄 테니 안 나와도 된다고 하면, 그는 자기 비하에 빠질 게 뻔했다.

우미는 태윤에게 불편함을 느꼈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졌든 간에, 자기에게 부담을 떠넘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대답을 유예했다.


태윤은 당황스러웠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도 호흡이 가빠왔다. 그제야 알게 됐다. 교체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계속 수업에 나오고 싶다는 것을. 인제 와서 농담이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어떡하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을 갈랐다.

"같이 하셔야죠, 태윤 작가님. 왜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힘든 일 있으면 동갑인 나한테 말하세요. 제가 다 해결해 주겠습니다. 선생님! 태윤 작가님이 잠시 마음이 약해진 것 같은데, 제가 오늘 잘 다독여서 다음 수업 때 데리고 오겠습니다. 갑시다, 작가님. 선생님 바쁘실 텐데."

재건은 태윤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둘은 우미에게 인사하고 강의실을 나섰다. 우미는 난감한 문제를 해결해 준 재건이 고마웠다.

그들의 말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우미는 강의실 문을 닫고, 열어뒀던 창문도 닫았다. 내리쬐던 햇살은 수그러들었지만, 거리를 오가는 차와 사람은 부쩍 늘어 있었다. 그녀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우미는 수강생들의 첫 느낌을 떠올려보았다. 자기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고, 감추는 듯한 사람도 있었다. 본명을 밝힌 사람도 있고, 필명만 알려준 사람도 있다.

그녀는 그들이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구원 : 마귀를 퇴치하는 사이비 목사와 그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신도들 이야기.

차누아르(재건) : 세계적으로 흥행한 소재를 융합한 이야기.

태윤 : 자기 안의 또 다른 자기들과 대화 나누는 이야기.

루네(이영) : 가장 친한 친구인 좀비 루네를 관찰하는 이야기.

사신(구진) : 자기를 괴롭힌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하는 이야기.

오드(수림) : 자기 신체 장기에 관한 이야기.

양산박 : 사회에서 낙인찍힌 변태들에게 인권을 찾아주는 이야기.



사실 우미는 그들에게 특별히 가르칠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같은 문화와 사회에 속한 인간의 삶은, 구조적으로는 큰 편차가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 개인에 대해 알아갈수록, 엇비슷함이라 여겼던 삶의 궤적이 수시로 빗나감을 경험하게 된다. 개인적 체험은 오직 그 사람만의 것이다. 혈육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판단할 수 없다.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배워야 한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이 시간이 남아돌아 여기 온 것은 아니라는 것. 모르는 것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작용했기에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우미는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자 막막함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들을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내게 기대하는 것이 있을 텐데, 뭘 해줄 수 있을까?'

그녀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았다. 그들은 왜 글을 쓰려고 하는 걸까?

재건의 경우엔 자신만만하게 돈이라는 이유를 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강렬한 기표였다. 어린아이도 이해시킬 수 있는 사회적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돈'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돈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집이나 차 같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랑이나 추종 같은 관념적인 것일 수도 있다. 복수나 증오 같은 아주 사적인 영역의 것일 수도 있다. 본인 외에는 알 수 없다. 본인이라 할지라도 진짜 이유는 모를 수 있다. 그가 드러낸 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구원은 재건과는 정반대이다. 쓰고 싶은 이야기 말고는 자기에 대해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녀가 드러낸 것이 무엇을 감추려는지 알아내야 한다.

말은 개인의 선택이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 다만 언어와 실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에, 그 차이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미가 이런 얘길 하면 어차피 소설인데 유난 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랬다. 누군가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물어보면 늘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자기도 몰랐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말이다.

그걸 알아야 자신에게 진실할 수 있고, 자기도 몰랐던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환상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야만 거짓된 쓰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소설은 허구지만, 작가는 실존이다.


[제미나이가 만들어준 이미지입니다]



창작물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건 이래서 별로고, 저건 저래서 별로야. 그럴 수 있다. 판단과 해석은 생존과 직결된 본능이니까. 하지만 소설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텍스트가 중개해 주는 감각과 감정을 차분히 받아들이면 된다. 초원과 밀림에서 벗어나게 해 준 선조들의 유산을 느긋하게 즐기면 된다.

변태스러운 평론적 전능감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신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삶을 결정지을 순 없다. 한 인간의 이야기는 그 자신만이 결론 내릴 수 있다.


우미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처음 느꼈던 막막함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대신 그 자리에 기대감이 들어차 있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제미나이가 만들어준 이미지입니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시시각각 드러나는 반응에 주목하자. 글은 박제되지만, 사람은 자신을 부수고 나온다. 그렇다면 글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라는 폐허 위에서 언제든지 다시 쓸 수 있다.

창작이 삶을 바꿀 수는 없다.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면 좋지 않을까. 나약하지만 또 강인한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더 좋지 않을까.

우미는 자기와 수강생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를 상상하며 강의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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