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모든 이미지는 Grok에서 생성했습니다]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기억과 무의식이 머무는 시적 공간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
누구에게나 생애 첫 기억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주 어릴 적 일화는 기억하지 못하고, 세 살에서 네 살 무렵의 기억이 최초라고 한다. 연구 결과, '아동기 기억상실'이라는 증상 때문에 그 이전 기억은 회상하지 못한다고 하던데, 이것도 추정에 불과해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나 뭐라나.
희귀한 사례로, 아주 어릴 적 경험을 최초 기억으로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레프 톨스토이는 신생아 때 자기를 씻겨준 유모의 부드러운 손길을 기억하고, 미시마 유키오는 엄마 자궁에 있을 때의 일이 기억난다고 한다. 물론 그들의 일방적 주장이라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내 생애 첫 기억은, 작고 어두운 방에 홀로 남아 물끄러미 방 안을 둘러보던 네 살 혹은 다섯 살 때의 일이다. 지금 그 방을 떠올려봐도 특별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자 머나먼 기억 한 귀퉁이에서 무언가가 존재했었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혼자라 생각했던 그 방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회색의 희미한 먼지 뭉치가 눈을 빛내며 날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았고, 그도 나를 보았다. 그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시선을 거두어도 줄곧 나만 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외로움이나 서글픔의 정체를 모르던 어린 내게, 그 감정이 무엇인지 경험시켜 준 최초의 존재였다.
이후로도 무수히 많은 그들이 나타났다. 나를 보는 이도 있었고, 나를 외면하는 이도 있었다. 어릴 땐 당연하게도, 모두에게 이들이 보일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얘기를 꺼내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동네 친구들, 이웃 어른들, 가족, 친지들 할 거 없이 말이다. 나는 인간에게 참으로 다양한 눈빛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기억을 회상하고, 글로 쓰고 있으면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특정한 주기 없이 나타나기도 했다. 나타나는 시간과 날짜도 다 달랐다. 하지만 집 안에서만 나타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집 밖에서는 한 번도 그들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성인이 되고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 집에서도 그들은 나타났다. 몇 개월 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른들은 할머니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나는 팔릴 때까지만 할머니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할머니 사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 나타나던 녀석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새로운 녀석들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베란다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거나, 의자에 앉아 햇볕 쬐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굽은 등을 바라보곤 했었다. 볕이 잘 드는 날이면 꽃 모양을 한 작은 인간이 나타나 나를 본다. 녀석과 시선을 맞추면 할머니가 햇볕 쬐던 모습이 생각나, 내 마음에도 온기가 돌았다.
해가 지면 녀석은 사라졌다.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날씨가 흐려 며칠 동안 그가 보이지 않으면 나는 울적해졌다. 생전에 할머니는 내가 기분이 좋으면 안심했고, 힘이 없으면 걱정했었다. 요즘 내 기분을 좌우하는 게 그 녀석이라니... 할머니가 이걸 알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할머니는 잠들기 전, 간혹 나를 방으로 불러 손이 닿지 않는 등에 파스를 붙여 달라고 했다. 지금 할머니 방은 비어 있는데, 어쩌다 밤에 할머니 방 전등을 켜면 파스 모양을 한 작은 인간이 나를 보고 있다. 녀석은 밤 8시에서 11시 사이에만 나타난다.
녀석과 눈이 마주치면 나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할머니는 근육통이 심해 밤마다 온몸에 파스를 붙였는데, 바닥에 파스를 늘어놓고 그 위로 몸을 뉘어 등에 붙이곤 했다. 통증이 심해 정확한 위치에 붙여야 할 때만 내게 부탁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매일 밤 할머니 방에 들러 파스를 붙여줄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내가 미웠고, 할머니에게 미안했다.
할머니는 욕조에 뜨끈한 물을 받아 목욕하는 걸 즐겼다. 가끔 나를 불러 등을 밀어달라고 했었다. 요즈음 욕실에 들어가 보면 때수건 모양 인간이 나타나 나를 빤히 쳐다볼 때가 있다. 녀석은 정해진 주기 없이 나타났다가 1~2시간 안에 사라진다.
나는 녀석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할머니는 내가 화장실 갈 일이 생길까 봐, 좋아하는 목욕을 빨리 마무리 짓곤 했다. 밤늦은 시간에 목욕하고 싶어도, 물소리가 시끄러울까 봐 참았다. 나는 할머니가 맘 편히 목욕할 수 있도록 오래 해도 되고, 밤늦게 해도 된다고 안심시켜 주지 않았다. 그래서 녀석을 보면 할머니가 만족해하던 기억과, 할머니를 배려하지 않은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든다.
꽃, 파스, 때수건 모양 인간은 내가 시선을 거두어도 계속 나를 보고 있다. 반면에 내가 시선을 주면 외면하는 녀석들도 있다.
내 방에 들어가면 책 모양 인간이 보인다. 내가 보면 책을 펼치고, 안 보면 책을 닫는다. 녀석의 행동이 내 눈치 보면서 게으름 피우는 것 같아 가끔 화가 난다. 그래서 일부러 계속 보기도 한다. 내가 시선을 거두면 책을 닫고 희미해지다가 완전히 사라진다.
주방에는 몇 시간 간격으로 그릇 모양 인간이 나타난다. 내가 보면 몸을 뒤집고, 안 보면 원래대로 돌아온다. 마치 내 눈을 피해 음식을 먹는 것 같아서 징그럽다. 어쩌다 못된 심보가 발동하면 일부러 쳐다보기도 한다. 음식을 못 먹게 하기 위해서다. 내가 음식을 먹으면 녀석은 곧장 사라진다.
지금 나는 거의 모든 일상을 거실에서 보낸다. 잠도 거실에서 잔다. 나는 할머니가 노인정에 가면 거실로 나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었다. 할머니가 집을 비운 오후 1시부터 5시까지는 닫혀 있던 감각을 활짝 열어, 목적 없는 창조적 사유 여행을 떠났다.
멍하니 바깥세상을 보기도 했다.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귀 기울였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냄새를 맡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을 좋아했다. 논리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생각나는 거라면 무엇이든 떠올렸다. 기이한 연상이 이어지더라도 검열하지 않았다. 어떠한 감정을 느끼더라도 해석하지 않았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는 동안 행복했지만, 할머니가 집에 오면 창피해졌다. 뭐 하면서 시간 보냈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나는 책 읽고 공부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오후 시간에 거실에 있으면, 만화책에 나오는 생각 풍선 모양이 나타난다. 내가 보면 풍선을 접고, 안 보면 원상태로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남들 눈을 피해 몽상의 세계로 도피하던 내 모습 같아 부끄럽다. 나는 수치심을 이겨내려고 일부러 녀석을 쳐다본다. 생각 풍선이 접히면 몽상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작은 인간들은 말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다른 이의 목소리로 변모해 내 안에서 아우성친다.
할머니 생각은 안 하는 이기적인 놈, 공부는 안 하고 딴청이나 피우는 놈, 돈은 안 벌고 처먹기만 하는 놈, 사람과 어울릴 생각은 않고 뭣 같은 망상에만 빠진 놈.
놈! 놈! 놈!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내가 진짜 그런 놈이라고 믿게 된다.
집 밖에서는 남들에겐 익숙하지만, 나에겐 낯선 것 투성이라 정신이 혼미해진다. 반대로 집 안에서는 인간이 아닌 낯선 존재들이 내 안을 흔들고 뒤집어 놓는다. 나는 놈들의 눈치를 보고, 놈들에게 눈치를 준다. 그들이 원하는 것에 억지로 나를 맞추고, 그들이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강요한다. 보여진다는 건 공포지만, 본다는 건 매혹적이다. 내가 당한 고통을 되돌려줄 대상을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보는 녀석들이 안 봐도 되게끔 행동하고, 나를 외면하는 녀석들이 보게끔 행동한다. 나를 통제하려 하고, 그들을 통제하려 든다. 보는 녀석을 통해 결핍을 깨닫고, 외면하는 녀석을 통해 결핍을 보상받으려 한다. 이 결핍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결핍의 보상은 새로운 결핍을 낳고, 결핍을 채우기 위해 또 다른 시선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나는 원한다. 나는 원치 않는다. 그들은 원한다. 그들은 원치 않는다.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나려면 외부인에게 알려 이해받아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 내가 떠나거나, 그들이 떠난다. 나는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을 찾아 세상을 유랑하는 욕망 없는 유령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괴물이다. 밀어낼 걸 알면서도, 들러붙는 멍청이다. 혐오할 걸 알면서도, 사랑을 찾아 헤매는 시대의 경계인이다.
나는 왜 고통받을 걸 알면서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가. 타인은 나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들의 공감에는 정체가 없다. 주체를 지켜내기 위해 감정을 거두어들인다. 나의 공허 속에는 그들이 있다. 뜯어먹느냐, 뜯어 먹히느냐는 같은 것이다. 달라도 소름 돋지만, 같아도 소름 돋는다.
당신은 내가 인간으로 보이는가? 나는 인간이라 말하지만,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원하지만, 원하는 것이 없고. 당신은 원하지 않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 나는 사람을 욕망하고, 당신은 세상을 욕망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같다.
나는 봄으로써 보여지는 존재로 길들여진다. 그래서 다르게 보이려고 한다. 다르게 보이기 위해서, 보는 존재에게 다르게 보이길 요구한다. 이 기이한 상호 침투가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 보고, 보여짐으로써 나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시선이 없으면 나도 없다.
*
나는 재건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말없이 빈 커피만 빨아대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 무서웠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그가 나를 버리느냐 아니냐만 남았다. 나는 사형을 선고받기 위해 법정에 선 죄수의 심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나는 무서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출 수 없었다.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그럼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무슨 부탁을...?"
"나랑 친구하고 말 놓읍시다. 어떻습니까?"
시련이다. 하지만 이번 폭풍은 피하지 않고 맞아보고 싶었다. 왠지 그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럽시다."
내가 제안을 받아들이자, 그는 일회용 커피컵과 뚜껑을 분리하더니 몇 방울 남지 않은 음료를 깨끗이 털어냈다. 그리고 나를 보며 팔을 휘둘렀다. 플라스틱 커피컵이 내 머리를 내리쳤다.
"악! 왜 때려?"
"맞을 만하니까."
"뭐?"
"친구야. 나는 네 얘기 믿는다. 그런데 말이다. 말을 좀 알아처먹게 해야지. 그렇게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와도 고개 절레절레 흔들면서 도망갈 거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말하는 방식이 문제다. 사실적이고 직관적으로 말해야지, 그딴 식으로 말하면 누가 좋아하겠냐? 자, 내가 해볼게. 솔직히 말하면 내 눈에 요정 비스무리한 것들이 보인다. 그것들이 자꾸 안 좋은 기억을 들춰내서 기분이 별로다. 근데 사람들한테 이 얘기하면 이상한 인간 취급하면서 멀어진다. 그래서 괴롭다. 내 얘기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덜 외로울 것 같다! 어때?"
"음..."
"생각 그만하고 대답을 하라고. 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응..."
"응이라고 했다. 앞으로는 나처럼 말하는 거다. 오케이?"
"노력해 볼게."
"노력은 그만하고, 그냥 나처럼 하자. 오케이?"
"오케이..."
"고맙다, 친구야!"
재건이 나를 안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밀어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를 이해해 주고 안아주는 사람은 할머니 이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냐?"
"아니."
"그래 인마, 남자가 이런 걸로 울면 안 되지."
"안 운다고!"
그는 한참을 껄껄대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바닷가 돌아다니는 사람들 봐라. 다들 즐겁고 행복해 보이지. 근데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감추고 싶은 유령이 있다. 모든 가족에게는 그 집안만의 비밀이 있다. 비밀이 드러났건 드러나지 않았건 간에, 그건 피를 타고 대대로 전해진다. 나도 몰랐던 우리 집안의 수치가 지금 내 삶을 지배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알면 대처할 수 있지만, 모르면 대처도 못 한다. 저기 웃고 떠드는 사람들도 우리랑 똑같다. 저 사람들이라고 안 힘들까? 함께니까 웃을 수 있는 거지. 섬처럼 떨어져 있으면 자기만의 바다에 고립된 유령일 뿐이다. 친구야! 우리 섬은 되지 말자."
재건은 말을 마치고 내 팔을 툭 쳤다. 나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는 그를 무시했었는데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마음 씀이 큰 친구였다. 그가 내 어깨를 흔들며 사투리로 말했다.
"우나? 안 쪽팔리나? 울지 마라."
"안 운다고!"
나는 울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 재건은 또 껄껄 웃더니 말했다.
"근데 선생님한테 왜 그랬냐?"
"뭐?"
"대기 인원한테 기회 주라며. 그거 진심 아니었잖아."
"그야 뭐..."
"넌 솔직하게 말하는 것부터 배워야겠다.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말이 여러 번 걸러져 나오니까 무슨 말을 해도 진심이 아닌 것 같다. 으이, 친구야?"
나는 마음을 꿰뚫는 그의 말에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자꾸 부추기는 바람에, 나는 정말로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선생님께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냥 말 걸고 싶었던 걸 수도 있고."
"새끼, 반했네."
"아니라고."
"또또 거짓말. 솔직해도 된다."
"아휴... 됐다. 근데 넌 휴식 시간에 왜 늦게 들어왔냐? 복도에서 화내는 여자 목소리도 들리던데. 무슨 일 있었나?"
"에이씨, 있었지! 무슨 일."
"무슨 일?"
"일단 자리 옮겨서 얘기하자. 좀 춥네."
"춥다고? 온갖 남자다운 척은 다 하더니 겨우 이 정도 추위에 벌벌 떠나?"
"아, 태음인이라서 그렇다고!"
"지랄!"
재건은 벌떡 일어서더니 나를 끄집어 올렸다. 나는 속절없이 딸려 올라가 어깨동무를 당한 채 끌려갔다. 나는 형사에게 연행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걸었다. 날이 쌀쌀했기에 그의 어깨동무를 뿌리치지 않았다. 실은 나도 태음인이라 추위를 잘 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