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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향기, 그림자

24.

by 김빗


햄버거가 먹고 싶었다. 치즈버거와 감튀가 먹고 싶었단 말이다. 그런데 돼지국밥이라니. 나는 부산 사람이지만 돼지국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재건은 국밥에 환장한 녀석이었다. 그는 음식을 씹지 않았다. 그에게 치아는 이를 닦기 위해 존재하는 시적 오브제 같았다. 식욕은 어찌나 왕성한지 국밥에 수육까지 주문해서 혼자 거의 다 먹고는, 순대국밥과 수육 고기를 추가 주문했다. 나 혼자 국밥 반 그릇도 못 비운 시점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소주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그는 두 번째 소주병을 들어 자기 잔에 따르면서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자한테 말 걸고 싶고, 위로받고 싶으면 그게 좋아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근데 난, 나를 드러내도 안전한 곳이라는 느낌을 받는 게 중요해. 무의식적으로 그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걸 왜 그런 식으로 확인하냐고. 다른 사람한테 무의식적으로 부담 주면서까지, 어? 앞으로는 의식적으로 좀 하자. 그래야 서로서로 편하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앞으론 안 그래야지."
"잘 생각했다! 근데, 진짜 한 잔 안 할겨?"
"못 마신다고."
"믿을 수가 없네, 입만 벌리면 구라라. 미안! 농담이다, 농담."
"됐고, 그 얘기나 해봐. 복도에서 무슨 일 있었는데?"

내 물음에 재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소주를 원샷했다.

"여자 꼬시다 까였다."
"구원 작가?"
"어. 흐흐흐."

그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흘렸다.

"잘해보려고 플러팅 갈겼는데 소리 지르면서 난리 치더라.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길래 나도 열받아서 한마디 했지. 그게 다다. 져준 거지, 뭐. 졌잘싸!"

그는 잔을 들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콜라잔을 들어 부딪혔다. 이번에도 그는 소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아!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서 구진 작가 가방 던졌나? 입으로 욕도 하는 것 같던데."
"그걸 봤냐? 관찰력 좋네. 네 말도 맞고, 그전에 나한테 반말한 것도 거슬려서 그랬지. 뭐라더라? 와하하 니 웃기네? 와하하는 뭐냐. 그 인간은 웃는 것도 참 희한하네."

구진을 험담하던 그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연신 낄낄댔다. 나는 그의 웃음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같이 좀 웃자."
"탱큐! 누아러! 건필하이소! 탱큐가 뭐냐 하하하. 건필이란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건지. 참 별난 인간이다. 그치?"
"야, 그래도 우리보다 한참 형 같던데 인간 인간 하지 말고, 작가라고 부르자."
"작가는 무슨. 개나 소나 다 작가여."
"선생님이 그렇게 하랬잖아."
"아유 아유, 알았어요. 사랑하는 선생님이 하라면 해야죠. 어어, 미안 미안. 진짜 안 할게."

나는 콜라잔을 던지려는 몸짓을 취했다가 그의 사과에 내려놓았다. 재건은 빈 소주병을 들어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말이란 게 참 웃기지 않냐? 소주병 봐봐. 초록색이잖아. 파랗다, 노랗다, 빨갛다는 말은 있으면서 왜 초롷다, 힇다, 자줗다 라는 말은 없는 걸까? 사투리도 희한하다. '우리하다'라는 말 아냐? 난 우리하다 처음 듣고 우리 같이 뭐 하잔 말인 줄 알았는데, 욱신거린다는 뜻이더라."


우리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문한 순대국밥과 수육이 나왔다. 그는 나눠 먹자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 햄버거 포장해 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재건은 음식이 나오자 먹는 데에 열중했다. 그가 말하지 않자 나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식당에 켜진 TV 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 수저 움직이는 소리, 음식 삼키는 소리, 주문하는 소리, 테이블 치우는 소리,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소리 등. 세상은 다양한 소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리가 사라진 세상은 얼마나 고요할까. 또 얼마나 무서울까. 귀가 안 들리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분들의 불편함이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재건은 음식을 말끔히 다 먹었다. 나는 깔끔하게 각자 먹은 만큼 계산하자고 했지만, 그는 구태여 자기가 계산했다. 나는 다음에 꼭 사겠다고 말하고 감사를 표했다.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밥 먹기 전보다 온도는 낮았지만 바람은 덜 부는 것 같았다. 소주 두 병을 비운 그는 얼큰하게 취했는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요정 이야기 쓸 겨?"
"모르겠다. 고민 좀 해보고. 너는 뭐 쓰려고?"
"이런 거 어때? 미래에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면, 인간이 온라인에 남긴 글을 분석할지도 몰라. 자기를 비판한 인간들을 특정해서 처벌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단 말이지. 그에 대비해서 인터넷 공간에 인공지능 찬양 글을 마구 써놓는 거야. 인공지능을 비판한 인간들이 죽어 나갈 때, 주인공은 그들에게 선택되어 새 시대의 왕이 되는 거지. 괜찮?"



"음... 잘 모르겠네."
"맨날 모른대. 그럼 이건 어때? 제정신 병원 이야기."
"제정신 병원?"
"요즘 오은영 박사가 대세잖냐. 그래서 '어둠의 오은영 박사'에 관한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세상이 갈수록 타인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중시하다 보니 이게 너무 과도해진 거야. 오지랖이 죄악이 된 세상! 사람들이 서로 침범하지 않으려다 보니, 세상이 점점 더 경직되어 가는 거지. 급기야 '제정신 증후군'이란 질병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답답함에 고통받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지만, 그럴 수가 없는 세상이 돼버렸어. 이 사회현상에 위기를 느낀 '어둠의 오은영 박사'는 제정신 병원을 설립해 Freedom Phobia를 치료하는 거야. 예의와 배려에 잠식된 극도로 제정신인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서로에게 농담도 던지고 장난도 치게 하는 '무례한 사이 돼보기' 테라피를 진행하는 거지. 어때?"



나는 그의 상상력에 탄복했지만, 선생님이 이 얘길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재미는 있다. 하지만 제정신 병원이라는 소재를 살리기 위해, 개인이 지닌 개별성을 죽인 것 같다. 인간은 같지 않다. 누구보다도 자기가 가진 개성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다. 그렇기에 '제정신 증후군'이란 질병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인간 존재를 한낮 소재거리로 대상화하고 소비하는 느낌이 든다.

아마 선생님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내 생각, 아니 선생님이라면 했을 법한 생각을 들려주었다.


"독특하긴 한데, 타인의 고통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이야기 아니야? 제정신 병원이란 곳이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을 구경하는 동물원 같은데. 독자인 우리는, 정상이라지만 정상이 아닌 그들을 구경하는 관람객 같고. 이 이야기가 어떤 독자층에 어필할 수 있을까?"

나의 반문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실존만 탐구하다가는 노잼 이야기가 돼! 허구는 허구답게 상식을 벗어나는 지점도 있어야 한다고!"


나는 그의 말에 100% 동감했다. 내가 즐겨하는 상상 역시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투성이니까. 하지만 선생님이라면 분명, 글쓰기 윤리도 염두에 둘 것 같았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아니면 미학적으로 변형해서 드러낼 것인가.

이 얘길 하면 재건은 그러겠지. 표현의 자기 검열에 빠지지 말라고. 작가에게 검열은 독이 된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여과 없이 감정을 드러낸 영화에, 감성팔이니 억지 감동이니 신파니 하면서 비난하지 않던가. 그의 이야기가 감성팔이식 서사는 아니겠지만, 노골적인 면은 분명히 있다. 소설이 다큐는 아니지만, 작가가 감정에 물들면 진실이 흐려질 수도 있다.

재건은 인간의 고통에 아파하는 내용이 아닌, 자기 감각에 몰두해서 감정을 소비하는 형태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에 인간은 없고, 자극만 남는다.

잠깐... 다르게 생각해 보면 표현은 사라지고 검열관의 윤리만 남을 수도 있지 않은가? 진짜 감정을 보여주는 게 뭐가 잘못된 거지? 절제된 문장으로 고통을 최소화하고 넘어가는 게 맞는 걸까? 그것이 인간성을 묘사하는 문학적 방법인 건가? 자기 연민이 잘못된 거야? 인물의 고통을 독자가 절절히 느끼는 게 잘못된 거냐고? 어쩌면 누군가는 잘못된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 자기감정의 일방적 표출은,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는 처사가 아니니까. 아...모르겠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또 또 생각한다. 그만 좀 생각하고 말을 하라고 말을!"

재건의 성화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흐릿한 눈이 날 보고 있었다.

"글 써서 노벨문학상이라도 받을 거야? 아니면 그냥 써! 쓰는 게 중요하지, 뭔 생각이 그렇게 많아?"

그의 말이 맞다. 글 한 편 제대로 써 본 적 없는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너무 진지하게 대답해서 미안하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넘어갈까?

"또 생각하네. 생각하지 말고, 말을 하라고 답답아! 아이고 죽겄다, 죽겄어."

그가 울화통을 터트리자 나는 민망함에 웃음이 났다. 내가 웃자, 그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네가 뭐라 해도, 난 내가 쓰고 싶은 거 쓸 거야. 어차피 소설이잖아. 이름도 내 멋대로 쓸 거야. 오은영 박사를 어은영 박사로 바꾸던지. 노골적이면 성별을 남자로 해서 어영박 박사로 하던지. ['어'둠의 오은'영' '박'사]. 이도 아니면 세상에 없는 성씨를 쓰던지. 성을 '치'씨로 바꿔서 이름을 치루라고 해도 상관없잖아. 소설인데 뭐 어때? 모든 걸 현실 원리에 맞출 거면 소설 쓰면 안 되지."


나는 재건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지만, 왠지 불안했다. 그에게서 조급함이 전해져 왔다. 나도 많이 들은 이야기지만, 그에게서도 자의식 과잉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이 불안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실과 픽션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는 걸까? 정말로 막 써도 되는 걸까? 작가가 함부로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지어도 되는 걸까?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히 물었다.

"진짜 그 이야기 쓸 거야?"
"나야 이거 써도 되고, 다른 거 써도 되고. 할 이야기야 차고 넘치지. 소재는 무궁무진하거든. 저기 산책하는 강아지 보이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지나가는 똥개도 웃기고 울릴 수 있어. 볼래?"
"아니. 엄한 사람이랑 개한테 민폐 끼치지 말자."
"민폐는 무슨. 예의 바르게 양해 구하고, 괜찮다고 하면 하는 거지."

나는 그의 말이 진심인지 술주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길 한가운데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우리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곳으로 가보았다.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서 있었고, 그 안에 아저씨와 앵무새가 있었다. 앵무새는 아저씨 말에 맞춰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다.

재건은 갑자기 원 안으로 들어가더니 아저씨에게 이 앵무새를 웃겨봐도 되냐고 양해를 구했다. 아저씨는 웃으면서 그러시라고 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앵무새 앞에서 재롱을 떨었다. 소위 말하는 개소리의 향연이었다. 구경하던 강아지가 재건을 향해 짖었다. 그러자 구경꾼 중 한 명이 속삭이듯 말했다.

"개가 다 짖네..."

나는 재건이 치욕받는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그를 원 밖으로 끌어냈다. 사람들은 그의 퇴장에 웃으며 손뼉을 쳐주었다. 아무리 술을 마셨다지만 그의 행동력과 추진력은 이해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했다.



나는 재건과 함께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우리는 가는 방향이 달라서 반대편 지하철을 타야 했다. 그와 나는 헤어지기 전에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나는 그가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는 모습을 지켜본 후 몸을 돌렸다.


나는 집 근처 역에서 내려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밥을 얼마 못 먹어서 배가 고팠다. 늘 하던 대로 키오스크 앞에 선 나는, 포장을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오늘은 매장에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먹고 가기를 눌렀다. 나는 치즈버거 세트를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가 빈 테이블에 앉았다.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감자튀김을 먹으려는데, 메신저 효과음이 울렸다.


♡태윤 오빠 오늘 즐거웠어용! 알랴븅~♡


재건이 보낸 메시지였다. 캐릭터가 하트를 날리는 이모티콘과 함께였다. 나는 건조한 이모티콘을 고르고 골라 답장을 보냈다. 그가 내 메시지에 곧바로 하트를 눌렀다. 나는 그의 애교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혼자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유령과 같았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어제의 기억에 붙잡혀, 오늘을 살지 못하는 존재였다. 말은 없고, 생각만 하는 자였다. 내 삶에 말해지지 않은 시간을 찾아 헤매는 자였다. 잊힌 존재였고, 누락된 인간이었다. 침묵하는 자이자, 공백 속을 떠도는 인간이었다. 기억 사이의 틈에 박혀 있는 존재였다. 살아있으나 삶에 닿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지금을 살아낸 현재적 인간이었다.


나는 햄버거를 오물거리며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나는 유령이 아니었다. 먹고, 싸고, 자고, 웃고, 즐기고, 살아 숨 쉬는, 이 땅 위에 발 딛고 선, 따뜻한 체온을 발하는 동물이었다. 태초의 짐승이 낳은 후예 중 하나였다. 내가 별종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햄버거를 씹고, 콜라를 마시는 무수한 인간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나는 햄버거 세트를 다 먹은 후, 집에 가기 위해 빈 트레이를 들었다. 그때 햄버거 모양의 작은 인간이 나를 보고 있는 걸 보았다.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를 보자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도 나를 보며 웃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너도 웃을 수 있는 존재였구나... 왜 그동안은 몰랐을까.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 그래, 오늘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녀석들과 함께, 악몽 없는 밤을 지새울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좋은 밤이 될 것만 같다.


[모든 이미지는 그록에서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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