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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향기, 그림자

25.

by 김빗


오랜만에 악몽 없는 밤을 보냈다.

꿈속 세계는 같은 공간, 같은 사람, 같은 기억이었지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내가 달랐다. 눈을 부릅뜨며 깨지 않았다. 꿈의 찌꺼기를 응축한 허무의 숨결도 토해내지 않았다.

고르고 편안한 호흡이 콧속을 오갔고, 눈꺼풀을 추켜올리는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감은 듯 뜬 듯, 눈 주위가 가벼웠다.
새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볼 수 있지만, 그동안은 볼 수 없었던 아침의 천장을 나는 한참 동안 응시했다. 천장이 매일 아침 나와 눈을 맞추려 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





하얀 벽지에 무늬는 없었지만, 미세한 패턴이 균일하게 펼쳐져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패턴 사이사이 드러나는 오목과 볼록의 대비가 선명했다. 마치 투명한 무늬가 돋을새김으로 상감되어 있는 것 같았다.

몇 년을 봐왔으면서도 몰랐다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집의 벽지는 내게서 멀어진 적이 없었다. 늘 곁에 있어도 관심 두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람을 대할 때도 이렇다. 선별적 관심과 선별적 무관심이 내 대인관계의 핵심이다. 모든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편이지만,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무심하게 대응한다. 반면 관심 가는 이가 있으면, 그 사람 눈앞에서 얼쩡거린다. 이건 의도한 행위가 아니다. 적응적이고 습관화된 행동 패턴일 뿐이다.

나는 마음에 없는 대화는 안 하기에,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는 있다. 내겐 타인이 먼저 다가오게 할 만한 매력이 없어서, 사람을 사귀려면 가벼운 대화가 필수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 그래서 관계가 어렵다. 재건 같은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고 희귀한 케이스다.


나는 어젯밤 잠을 청했던 거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좋아한, 오래된 소파다. 앞으로는 벽지도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생각은 그만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천장 벽지가 일렁였다.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뿌예지더니 생각 풍선이 나타났다. 녀석이 보일 시간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랐다. 내가 보고 있으면 풍선을 접었었지만, 지금은 펼쳐져 있었다. 녀석을 보면 몽상으로 도피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일부러 접게 했는데, 오늘은 왜 펼쳐져 있는 걸까? 녀석도 무언갈 생각하고 있나? 혹시 내 생각하는 건가?

"무슨 생각해?"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처음으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녀석은 풍선을 펼친 채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괜찮아. 하고 싶을 때 천천히 해도 돼."

나는 아이에게 말하듯 다정하게 타일렀다. 그러자 녀석은 점점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마치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나는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자, 세상의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새들의 지저귐, 바람에 맞서는 나뭇잎들의 비명, 가까워졌다 다시 멀어져 가는 차들의 엔진소리, 공기를 타고 번지는 사람들의 웅성임, 영역 싸움을 벌이는 고양이들의 앙칼진 외침.

오전의 소리는 고요한 뇌를 각성시켰다. 나는 몸에 묻은 잠의 잔재를 완전히 벗어내기 위해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왜 지난밤 꿈은 악몽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어제 참석한 수업 때문인가? 재건, 선생님,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수업에 대한 기대감. 그래, 다른 이유는 없겠지.


문득 과제 생각이 났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었지. 대표적인 내 안의 나는 몽상을 즐기는 나다. 그런데 녀석을 다른 나라고 볼 수 있을까.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 같은데. 그렇다면 다른 나는 또 누가 있을까. 외로운 나, 분노하는 나, 질투하는 나, 미워하는 나, 미안해하는 나, 부끄러워하는 나, 사랑받고 싶은 나.

생각해 보니 모두 감정에 관한 자아다. 누구나 느끼는 감정을 내 안의 또 다른 나라고 거창하게 명할 순 없지. 어쨌든 나를 전부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 특히 가족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물론, 진짜 고백이란 있을 수 없겠지. 타인이 알아줬으면 하는 방식대로 수정해서 드러낼 테니까. 이런 걸 자기 고백이라고 부를 수 있나. 타인에게 보여지고 싶은 내 모습을 교묘하게 편집해서 '가짜 나'라는 상품을 전시하는 게 아닐까?

따지고 보면 감정 표현도 일종의 속임수잖아. 공감, 공감하지만,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연기해 주는 거니까. 그게 진짜 내 감정일까? 거짓된 글을 쓰느니, 진실되게 쓰고 욕먹는 게 낫지 않을까? 상처는 조금 받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재건이 말한 대로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를 써볼까. 현실 원리에 집착하지 말고, 말이 안 되더라도 일단 써보는 거지. 소설이라면 무슨 내용을 쓰더라도,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잖아.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손에 든 커피를 다 비웠다. 베란다 창을 열어뒀더니 집안에 냉기가 돌았다. 나는 밖으로 나가 창문을 닫았다. 바람이 멎고 그 공간에 햇살이 채워지자, 새로운 온기가 피어났다. 나는 거실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베란다 구석 화분 사이에서 녀석이 날 보고 있었다. 꽃 모양의 작은 사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잠시 녀석을 보다가 들어왔겠지만, 오늘은 말이 걸고 싶어졌다.





나는 지금껏 녀석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말 걸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녀석들이 진짜로 대답할까 봐 무서웠다. 그들은 그냥 그곳에 있어야 하지, 말하고 살아 움직여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래야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들은 떠올리기 싫은 나의 상처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그들이 입을 열면 내 안의 상처를 마구 헤집어 놓을 것 같았다. 내 존재를 뿌리째 뽑아버릴 녀석들 같았다. 나는 그들의 말에 반응하지 못하고 소멸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 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나만의 상상이지 않은가. 그들의 말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이젠 상상이 아닌, 진실을 알고 싶다. 나는 꽃 모양 인간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녕."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늘 웃는 상이었기에 안심이 되었다. 나도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안녕."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웃는 얼굴로 날 보고만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말이 안 된다는 걸 안다. 누군가는 정신과 병명을 들먹이며 병원에 가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그들의 존재는 명백한 진실이었다. 그래서 녀석의 대답을 꼭 듣고 싶었다. 너는 누구이고, 왜 여기에 있는지 묻고 싶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한 번 더 인사했다.

"안녕, 예쁜 꽃아."

내 말에 녀석은 소리 없이 까르르 웃다가 사라졌다. 분명히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녀석의 대답을 듣는 데엔 실패했지만, 반복해서 말을 걺으로써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내민 서툰 손길에 반응해 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 녀석들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자. 말이 안 되지만, 말해 보자. 실패해도, 말 걸어보자. 네가 내 말에 반응하고, 나도 네 말에 반응하는 날이 오면. 그때 우리, 대화 나눌 수 있겠지. 비록 그것이 상처가 되더라도 말이야.



잠잠하던 거실이 벨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광고 전화나 보이스 피싱 이겠거니 하며 폰을 보았다. 아뿔싸, 재건이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 걸까.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어제 그와 친구 하기로 했기에 나는 슬며시 전화를 받아보았다.

"여보세요."
"오빠, 태윤 오빠."
"오빠라고 부를 거면 목소리 변조하는 노력이라도 하던지. 걸걸하게 오빠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까칠하기는. 뭐 하냐?"
"멍 때리는 중."
"그래? 그럼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참 내. 아침부터 또 무슨 얘기가 있다고. 해봐."

내 대답에 그는 잔뜩 흥분하며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은밀한 취미가 하나 있거든. 바로 블랙박스로 대화 엿듣기. 우선, 공유 차량을 빌려서 조용한 곳으로 가. 주로 산복도로 같은 곳. 거기 차를 세워놓고 블박 SD카드를 뽑아서 내 폰에 연결하는 거지. 그럼, 사람들이 나눈 대화를 들을 수 있어. 아! 절대 블박 전원을 끄면 안 돼. 그러면 업체에서 알 수도 있어. 전원 켜진 상태로 뽑아야 해. 이게 예전에는 다 됐는데 요즘은 업체에서 차단하는지, 영상은 보이는데 목소리가 안 들리더라. 그래서 한동안 취미생활 접었었는데 오랜만에 생각나서 오늘 차 빌렸거든. 그런데 운 좋게 목소리가 들리더란 말이지. 신나게 듣다가 흥미로운 소재를 발견했다 이 말이야. 궁금하지?"
"뭔데?"
"그것은 바로, 바로! <절대 동화를 읽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위한 동화!>"
"엥?"
"어떤 부부가 대화하는 걸 들었는데, 아내가 동화 쓰는 것 같더라고. 아내가 남편에게 자기가 쓴 동화 어떠냐고 물으니까, 남편이 퉁명스럽게 노잼이라는 거야. 그러자 아내 왈, 당신은 마음이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져서 동화의 재미를 알 수가 없다. 그니깐 남편이 뭐라는 줄 아냐? 당신 동화는 전개가 뻔하다. 나 같으면 그렇게 안 쓴다. 동화에 동물들이 나오는데 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냐. 동물은 동물답게 먹고, 싸고, 자는 일상을 반복하다가 적당히 크면 잡아먹거나, 갖다 팔아야 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모여서 돼지를 거래할 때, 어떤 돼지는 안 팔리려고 똥오줌 싸고 구토하거나, 아픈 척하면서 소리를 꽥꽥 질러. 그러면 사람들이 그 돼지를 안 사는 거야. 돼지 주인은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늑대 무리가 나타난 거지. 주인이 벌벌 떨고 있을 때, 돼지가 아까처럼 난리 치면 병들었다고 여기고, 늑대들이 주인을 잡아먹으려고 해. 주인은 자기도 바지를 벗고 똥오줌을 싸고, 소리를 꽥꽥 질러. 놀란 늑대들은 달아나 버려. 그제야 깨달은 주인은 목숨을 구해준 돼지를 평생 자식처럼 아끼며 살아간다는 아름다운 엔딩. 어때, 재밌지?"
"뭐가 재밌다는 거지...? 근데 블박 그거 불법 아니야? 걸려서 신고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아직 걸린 적 없는데. 전원 켜진 채로 SD카드 빼면 마지막 영상이 손상될 수도 있다는데, 그 정도로 걸릴 일은 없을 듯."

나는 스피커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앞으로 그런 짓 하지 마라. 왜 자꾸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려고 하냐? 나 그럼 너하고 친구 못한다."

내 말에 재건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그래, 친구가 하지 말라면 안 해야지. 앞으론 안 할게. 진짜."
"고맙다, 안 한다고 해줘서. 근데 그 짓은 어쩌다 하게 된 거냐?"
"아니 뭐, 사람들 대화가 궁금해서 시작했지. 처음에는 그랬는데, 듣다 보니 남 이야기 엿듣는 게 특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중독성 있더라고."
"진짜 하지 마라. 진짜."
"알겠어, 오빠... 약속! 왜 말이 없어, 진짜 안 할게. 약속해 줘. 약속!"
"어휴... 약속."

그는 기어이 내 입에서 약속이란 말을 받아냈다. 우리는 조금 더 통화하다가 끊었다. 어제는 분명 [제정신 병원 - 어둠의 오은영 박사] 이야기를 쓰겠다더니, 오늘은 또 딴소리다. 재건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모르겠다. 나도 이제 과제나 해야겠다. 뭐였더라...
나는 자료를 뒤적여, 적혀있는 과제를 다시 읽어보았다.



[문학 창작 과제]

- 1회 차 -

일. 본인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인물 만들기.

이. 이야기를 긍정하는 인물과 부정하는 인물, 중립에 선 인물을 등장시켜 대화시키기. 갈등하는 두 인물은 서로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반박하도록 설정. 중립에 선 인물은 두 사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중재하기.

삼. 대화가 끝난 뒤, 내가 느낀 생각과 감정을 풍경, 소리, 감각, 사물, 행동만으로 묘사하기. 직접적인 감정 묘사 금지.

사. 세 명의 인물을 합쳐, 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적 갈등 묘사하기.



막상 하려니 어렵게 느껴지네. 그래도 해보자.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드디어 시작이다. 힘내자, 태윤아. 화이팅!

나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아침밥은 조금 있다 먹기로 했다.



[모든 이미지는 제미나이에서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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