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우미는 오늘도 수업 시간보다 한 시간 이른, 오후 한 시에 강의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전과 같은 절차를 행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오후의 온기를 머금은 산소를 들이켰다. 손가락을 벽으로 가져가 거친 촉감을 느꼈다. 눈을 감고, 정면으로 비쳐 드는 햇볕에 몸을 맡겼다. 일주일 동안 얼어있던 몸과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 비켜서서 햇살을 흘리고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수요일 오후 주택가는 한적하면서도 분주했다.
그녀는 건물 외부 감각에 익숙해지자,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블라인드 커튼을 내려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분명히 했다. 형광등을 켜고, 책상을 원형으로 배치했다. 빈 책상 위에 자료를 놓았다. 차례차례 수업 준비를 하자 들뜬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어느덧, 마음의 준비도 끝나 있었다.
우미는 자기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오늘이 과제 발표 첫날이긴 하지만,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다. 사실 좀 놀라웠다. 절대 쉬운 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히 구진이 빠질까 봐 염려됐다. 하지만 그도 과제를 완료해 메일을 보내왔다.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그녀는 그가 기특했다. 글쓰기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우미는 수강생들이 보내온 과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집에서 몇 번이나 읽었지만, 수업 전에 읽으면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는 사이 수강생들이 속속 도착했다.
우미는 자리에 앉은 수강생들을 보았다. 자리 배치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지난 시간에는 자기 왼편으로 구원, 재건, 태윤 순서로 앉았었는데, 오늘은 재건과 태윤이 자리를 바꿔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전과 같았다. 우미는 사람들과 가벼운 담소를 나눈 후, 수업을 시작했다.
"다들 열심히 준비해 오셔서 감사해요. 오늘은 사신 작가님 과제로 시작해 볼게요."
그녀의 말에 구진은 놀란 표정으로 구부정한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이고, 부담되게 와 저부텁니까. 개판일 낀데."
"얼마나 잘해오셨는데요.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그럼 1번 과제부터 읽어볼게요. 다른 분들이 듣기 편하도록 조금 고쳤으니까, 양해해 주세요."
"암요, 쌤 편하신 대로 하이소."
구진이 보낸 글은 맞춤법과 단어 선정, 문장구조가 엉망이었다. 간간이 욕도 섞여 있었다. 우미는 그 점을 고려해, 최소한의 수정만 가해서 자료에 타이핑했다.
[일. 본인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인물 만들기.]
"사람 죽이는 글 썼다가, 그 사람을 실제로 만나면 글에 적은 대로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면 영영 빵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죽이진 말고, 대화로 풀거나 욕하는 수준에서 끝내라. 욕이야 좀 칠 수도 있지, 뭐."
우미가 구진의 글을 읽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이어서 읽었다.
[이. 이야기를 긍정하는 인물과 부정하는 인물, 중립에 선 인물을 등장시켜 대화시키기. 갈등하는 두 인물은 서로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반박하도록 설정. 중립에 선 인물은 두 사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중재하기.]
<긍정하는 인물>
"어렸을 때부터 절도범으로 소년원에 드나들었다. 어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갇혀있는 생활은 힘들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비슷한 부류의 인간들에게 연대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살면서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부모는 두들겨 패기 일쑤였고, 모욕과 조롱을 반복했다. 부모 논리대로라면, 나는 태어나선 안 될 인간이었다. 하지만 소년원에서 만난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보다 더한 놈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가족애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년원에서 출소하자, 놈들은 온갖 범죄에 나를 끌어들였다. 나도 나쁜 놈이지만,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 좀도둑이라서 푼돈이나 작은 물건 훔치는 게 다였다. 그런데 놈들은 사기나 강도처럼 엄한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일을 제안했다. 내가 거절하자 놈들이 변했다. 나는 그들을 형제라 믿었는데, 부모가 내게 한 것처럼 조롱하고 모욕했다. 그럼에도 거부하자 나를 집단 폭행했다. 그들은 엉망이 되어 쓰러진 나를 보며 부모처럼 말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나가 죽어라."
"나는 글로써 이 치욕을 복수할 것이다. 내가 당한 것과 똑같이 해주고, 더한 처벌도 내릴 것이다. 실제로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잘못인가?"
<부정하는 인물>
"더한 처벌은 뭘 말하는 건가?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당한 대로 돌려준다는 건 폭행하겠다는 말 아닌가. 네 말대로 글을 써서 분노를 해소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근데 그렇게 안 되면 어떡할 건데? 글 쓰면서 옛 생각이 떠올라 더 화나면 어쩔 건데. 그들을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마음속 분노가 폭발해서 실제로 상해를 가할 수도 있다. 그러면 절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형량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복수하는 글 말고, 마음을 다스리는 글 같은 거 배워서 써봐라."
<중재하는 인물>
"구진아. 앞으로 사고 안 치고 열심히 살기로 행님하고 약속했제. 네가 오토바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거의 공짜로 사게 해줬잖아. 사장님이 네 앞에서는 통 크게 할인해 주는 것처럼 했지만, 실은 나머지 금액 행님이 결제한 거다. 그러니까 행님 부탁 좀 들어도. 내가 형사지만, 너를 어릴 때부터 봐왔잖아. 막냇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다. 글로 복수하더라도, 잔혹한 처벌은 하지 말고 꿀밤 정도만 맥여라. 욕 정도야 할 수 있지만, 웬만하면 신체에 상해는 가하지 마라.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구진아. 네 말도 맞다. 괜히 글 썼다가 분노가 더 쌓일 수도 있겠지. 우연히 그놈들 만나면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고. 근데 나는 쌓인 건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로라도 복수하면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겠나? 마음을 다스리는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그걸로 마음속 응어리가 해소되겠나 싶다.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복수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삼. 대화가 끝난 뒤, 내가 느낀 생각과 감정을 풍경, 소리, 감각, 사물, 행동만으로 묘사하기. 직접적인 감정 묘사 금지.]
금마들이 모여있다. 나는 오함마로 내려친다. 아파하면서 비명을 지른다. 더 세게 내려친다. 그때 행님이 나타난다.
"고마 해라, 구진아. 그 정도면 됐다."
나는 행님을 본다. 오함마를 내려놓는다. 행님이 어깨를 두들겨준다. 나는 쓰러진 놈들한테 욕하고, 침을 뱉는다.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갈기려니까 행님이 못 하게 말린다. 나는 행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행님이랑 같이 떠난다. 행님이 잘 참았다면서 밥 사주겠다고 한다. 나는 얼마 전에, 형사들이 강력 사건 해결하는 데 일조했다. 형사들은 내게 고마워했다. 부모 말대로라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어야 하는데, 범인 검거에 도움이 됐다고 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사. 세 명의 인물을 합쳐, 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적 갈등 묘사하기.]
"근데 부모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사실은 부모한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영화 '똥파리'처럼 부모한테 욕하고 뺨이라도 때리고 싶다. 그렇게 해도 내 마음은 안 풀릴 것 같다. 자식을 학대하려고 낳은 부모가 있을까 싶겠지만, 내 부모가 그렇다. 부모 생각만 하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건 다 때려 부수고 싶을 정도다. 부모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부모한테 복수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어떨 땐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게 처벌했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복수해 왔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더 기분 나쁘고, 허무하다. 아무리 나쁜 부모라지만, 부모를 해치는 생각을 하고 나면 죄책감도 든다. 나는 역시 별수 없는 쓰레기라는 자괴감도 든다. 복수고 뭐고, 다 모르겠고.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복수하는 글 말고, 마음을 다스리는 글을 써보면 진짜로 도움이 될까?"
우미가 구진의 글을 다 읽자, 강의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원래 우미는 한 사람의 과제를 읽고 난 후, 수강생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생각을 철회했다. 자기가 뭔가 질문했을 때 솔직하게 답하기보단,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거기에 맞춰 대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미는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사신 작가님.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부담스러운 질문은 답변 안 하셔도 돼요."
"예. 할 수 있는 건 다 하께예."
"제가 읽은 글 내용이 전부 사실인가요?"
"예."
"작가님이 소년원 갔을 때, 부모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구진은 이 질문을 듣고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남 이야기하듯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쌍놈. 내 이럴 줄 알았다."
"출소하고 난 후에는요."
"출소하고부터 집에 안 갔습니다. 그때가 언제고, 벌써 20년도 더 됐네. 이제는 완전히 남남이지 뭐."
우미가 수강생 정보에서 확인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자기보다 한 살 어린, 비슷한 또래의 삶인데 너무나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기 질문이 취조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우려도 됐다. 하지만 글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 있었다. 만약 그가 답변을 거부하는 질문이 있다면, 일단 멈추고 서서히 알아가면 된다.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정보이므로, 그가 써야 할 글의 주제를 결정할 수 있는 키포인트가 될 수도 있다. 그녀는 질문을 이어갔다.
"중재하는 인물이 형사님인가요?"
"예. 어릴 때부터 저 잡아서 소년원 하고 교도소 보낸 행님입니더."
"그럼 싫어할 법도 한데, 안 그러신가 봐요?"
"첨에는 싫어했죠. 근데 행님은 저 포기 안 하더라고요. 딴 놈들은 다 배반해도 말이에요. 그래서 저도 친형님이라 생각하고 따릅니다. 행님 봐서라도 앞으로는 착실하게 살 겁니다."
"만약, 친형 같은 형사님이 다른 사람들처럼 작가님 배신하면 어떨 거 같아요?"
이 질문에 그는 우미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뭔 소린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이소. 그라믄 내 죽을 깁니다. 형사도 못 믿으면 누굴 믿고 살란 말입니까."
"형사님께 연대감이나 가족애를 느끼는 건가요?"
"당연하죠. 와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는교?"
"그렇군요. 그럼, 다른 질문 할게요. 그렇게 미워하는 부모님인데 머릿속에서 복수하고 나면 왜 죄책감과 자괴감이 들까요? 통쾌하거나 후련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그는 우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몰라요."
"뭘 모른다는 거죠?"
"아, 모른다고요."
"생각해 본 적은 있으세요? 왜 부모님께 복수하면, 죄책감이 들고 자괴감이 드는지 말이에요"
"생각하기 싫다고요!"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이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강의실에서 뛰쳐나갈 것 같았다. 우미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다시 질문했다.
"왜 싫죠? 뭘 생각하기 싫은 거죠? 머릿속으로 부모님께 복수하면 어린 시절이 떠오르나요? 작가님이 모욕받고, 조롱당하고, 두들겨 맞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가요?"
"에이씨! 뭐 하는 거야!"
급기야 구진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의 책상이 앞으로 넘어갔다. 우미는 천천히 다가가 책상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글 쓰려고요. 사신 작가님이 좋은 글 쓸 수 있게 도우려고요."
구진은 화를 참으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좆같은 부모라도 그래 하고 나면 기분이 좋겠어요? 당연히 안 좋지."
"작가님. 형제 있나요?"
"누나요."
"누나는 부모님과 사이가 어때요?"
"그건 또 와요?"
우미는 여전히 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구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잘 지내겠죠, 뭐."
"차별인가요?"
"차별은 아니고, 내가 성격이 지랄 맞아서 그런 거죠. 누나는 착하니까."
"부모님 보고 싶지 않아요?"
"전혀요."
"작가님 얘기만 들으면 부모님이 잘못한 게 맞아요. 그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작가님. 떠올리기 싫겠지만, 우리 앞으로 어릴 적 이야기 좀 해봐요. 부모님과 있었던 일들, 차근차근 되돌려봐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진짜 싫다고요."
우미는 찡그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모두가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작가님이 일부러 외면하는 일들이 있을 수도 있어요. 알면서도 모르는 것들 말이에요. 그걸 알아야, 작가님 분노의 근원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아따 마... 우리 선생님 참말로 끈질기시네. 보고요, 보고!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고맙습니다, 작가님."
우미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녀는 자료를 넘기다가 어떤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사신 작가님이 복수라는 테마로 과제를 해오셨는데요. 복수를 주제로 한 이야기를 써오신 분이, 한 분 더 계십니다. 구원 작가님."
우미는 구원을 쳐다봤다.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다소곳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만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하거나 불안해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수강생 중 가장 어렸지만, 감정은 제일 잘 감추는 듯했다.
"구원 작가님 과제는 직접 읽어 주실래요?"
"네."
우미는 그녀가 어떤 대목에서 표정과 목소리에 변화가 생길지 궁금했다. 구원은 빈틈없는 자세로 자료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