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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향기, 그림자

28

by 김빗


네 마음,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하면 믿어주겠니? 네가 느낀 배신감, 나도 마음 깊이 공감해. 아빠를 사랑했으니까. 아빠의 결점을 알고도 미워할 수 없었으니까. 세상이 아빠에 대해 떠들어대는 소문과, 네가 경험한 아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아빠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왔으니까. 우리 딸이 최고라고 해줬으니까. 세상에서 너를 가장 아껴 주었으니까. 하지만 넌 아빠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을 알고 있었어. 사실이 아닐 거라며 외면해 온 거 다 알아.

엄마가 그랬거든. 너는 엄마를 따라한 거야. 엄마는 자식들보다 아빠를 더 사랑했거든. 아빠가 연락 안 되고, 귀가가 늦으면 엄마는 너무너무 불안해했어. 그럴 때면 엄마는 너와 동생을 돌볼 여력이 없었어. 너는 엄마를 대신해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어. 강해져야 했어. 엄마보다 굳건해져야 했어. 네가 마음의 가장이 되어야 했어. 엄마를 위로해야 했어. 엄마는 위로받는 걸 좋아했거든. 엄마 마음 알아주는 건 우리 큰 딸 뿐이라고 했거든.

너는 엄마의 말을 듣고 뿌듯해했어. 진짜 가장이 된 것 같았으니까. 네가 강한 사람이라는 걸 엄마가 인정해 준 것 같았으니까. 아빠라고 다를까. 아빠는 엄마의 언어를 외면했지만, 네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줬지.

아빠, 엄마가 걱정해요. 연락하면 잘 받고,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마요. 그래, 우리 딸이 하는 말이라면 아빠가 따라야지. 걱정 안 해도 된다. 사람들 만나다 보면 연락 못 받을 수도 있고, 늦어질 수도 있다. 엄마는 의심이 많아. 아빠는 엄마가 무서울 지경이다. 그래도 우리 딸 덕분에 버티고 산다. 고맙다, 딸아.

너는 누구 편도 들 수 없었지. 아빠는 아빠만의 사정이 있고, 엄마는 엄마만의 감정이 있으니까. 둘 다 사랑했으니까. 다만, 너는 동생이 걱정됐어. 어린 동생은 엄마 아빠보다 너를 더 믿고 의지했거든. 언니가 엄마면 좋겠다고 얘기했거든. 동생이 자라서 엄마 아빠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무서웠어. 그리고 언니인 너를 미워할까 봐 겁이 났어. 너는 운 좋게도 엄마 아빠 사이가 좋을 때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두 분한테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었으니까.


네가 동생 머리를 땋아줄 때였어. 거울을 보던 동생이 말했어.

"못생겼어."





너는 손을 멈추고 거울 속 동생을 바라봤지. 동생 눈망울이 슬픔에 젖어 있었어. 어린아이에게서 발견하기 힘든 눈빛이었지. 너는 동생이 한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동생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거울 속 너를 보며 말했어.

"언니는 예쁜데, 나는 못생겼어."

그때 넌 무너질 뻔했어. 동생이 너를 비교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야. 너는 수많은 여자아이에게 질투 어린 대상이었어. 대부분의 남자가 너에게 관심 가질 때, 대부분의 여자는 너를 미워했어.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마저도 그 지독한 굴레에 합류해 버린 것 같았어.

거울 속에 엄마를 닮은 동생과, 아빠를 닮은 네가 눈을 맞추고 있었어. 동생 눈에서 전해지는 불안이 꼭 엄마를 보는 것 같았어. 너는 거울을 치웠어. 그리고 동생을 안아줬어. 동생은 울먹이며 말했어. 나는 왜 엄마를 닮아서 못생겼냐고.

엄마 마음이 이런 걸까. 거울을 보면, 아빠가 다른 여자에게 가버릴까 봐 불안한 걸까. 아빠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어. 몰래 만나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다. 큰 딸하고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여자도 있다. 엄마와 결혼한 이유는 단지 돈 때문이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빠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런 짓을 저지르겠어. 그래. 아닐 거야. 너는 아빠를 믿기로 했어.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지. 영원히 모를 수만 있다면,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도 괜찮겠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영원이란 허상이더라.

네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 직장 문제로 우리 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게 됐어. 전학 가서도 네 일상은 전과 비슷했어. 남자들의 무수한 관심과, 여자들의 무한한 질투. 너는 성격이 쾌활하지 않았어. 그래서 자기를 지키기 위한 연대를 맺을 수 없었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괴롭힘이 시작되면 홀로 견뎌야만 했어.

이사 오기 전에는 교회 활동으로 학교에서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어. 교회에는 질투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거든. 그래서 넌 더욱 교회에 매달렸어.

이사 온 후, 엄마 아빠에게 새 교회를 찾아보자고 했어.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부모님은 네가 얘기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지.

그때 동생이 다섯 살이었어. 엄마는 어린 동생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았어. 전에는 가까운 곳에 살던 할머니에게 맡길 수 있었지만, 이곳엔 연고가 없었어. 평일 내내 어린이집에 맡겨지던 동생이었던지라, 엄마는 주말을 동생과 보내려 했지. 그래서 교회에는 너와 아빠만 가게 됐어.

너는 예전 교회 분위기를 기대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어. 이 교회 또래들은 너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어. 적응하지 못한 너는 언젠가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았어. 아빠만 교회에 다니게 된 거야. 그게 문제였어. 아빠는 돈 많은 미망인과 눈이 맞아, 엄마에게 이혼을 요구했어. 일을 하지 않던 아빠는 불륜녀와 동거하며 집에 오지도 않았어.

엄마는 교회에 찾아가 목사님께 이 사실을 알렸어. 불륜을 저지른 여자를 출교 해달라고 요청했어. 하지만 목사님은 엄마의 요구를 거절했어.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엄청난 봉헌금을 내고 있었거든.

진통 끝에 엄마 아빠는 이혼에 합의했어. 엄마는 아빠와 관련된 물건들을 하나하나 처분했어.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집에 왔어. 꼭 가져가야 할 물건이 있었거든. 너는 학교에, 동생은 어린이집에 있을 때였어. 아빠가 보고 싶었던 너는 꾀병으로 조퇴했어. 차마 집에 가지는 못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갔어. 아빠가 늘 주차하던 장소가 있었거든.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아빠 차가 보이지 않았어. 대신 아빠가 주차하던 자리에 비싸 보이는 외제차가 있었어. 전화번호를 확인한 너는 그 차가 아빠 거라는 걸 알게 됐어.

너는 건너편 차 사이에 쪼그려 앉아 아빠가 나오길 기다렸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나타났어. 오랜만에 본 아빠는 다른 사람 같았어. 값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어. 아빠는 트렁크를 열어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넣었어. 공간이 부족했는지 커다란 골프가방을 꺼냈어. 아빠에게 없던 물건이었어. 골프가방과 외제차를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은 아이처럼 해맑아 보였어. 비로소 넌 외면해 왔던 소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아빠는 바람둥이다. 아빠는 돈 보고 엄마와 결혼했다.

엄마가 돈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평생 자기 월급 일부를 아빠에게 지원했어. 덕분에 아빠는 일도 안 하며 유유자적 지낼 수 있었지. 그런데 훨씬 돈 많은 여자가 나타난 거야. 너는 어두운 주차장에 쪼그려 앉아, 아빠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어. 행복해 보이는 아빠를 보며 너는 결심했어. 마음속에서 아빠를 지우겠다고.

엄마는 출근도 못 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어. 엄마는 정신과에서 진단서를 발급받아 3개월 무급 질병 휴직을 신청했어. 그런데 엄마는 병원에서 타온 약을 먹지 않았어. 너는 힘들어하는 엄마가 딱해 보여 약 먹기를 권했지만, 엄마는 종교적 믿음으로 극복하고 싶어 했어.

엄마는 여러 교회를 전전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어.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알게 된 사람 소개로 외진 곳에 있는 개척 교회에 가게 돼.

그 교회 목사님은 사람이 느끼는 고통은 마음속 마귀 때문이라며, 마귀를 퇴치하는 의례를 행했어. 단순한 기도가 아니었어.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머리에 손을 얹는 거야. 그리고 마귀를 퇴치하는 주문을 크게 외며 사람들을 밀쳤어.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져. 바닥에는 두터운 매트리스가 깔려있어서 다치진 않았어. 일어선 사람들은 마귀를 쫓아내 주셔서 고맙다고 울먹였어.





엄마도 이 의례를 받고 거액의 감사헌금을 냈어. 이곳에 다녀온 엄마는 마음이 편해졌다고 네게 말했어. 너는 듣자마자 사이비종교라는 걸 알았어. 그래서 다음부턴 가지 말라고 엄마를 말렸어. 하지만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녀왔어. 그때마다 엄청난 비용을 지급했지만, 엄마 표정은 점점 밝아졌어. 엄마 말로는, 다른 곳엔 없는 공동체의 정을 느낄 수 있다고 했어.

궁금해진 너는 엄마와 함께 그곳으로 가서, 참여하는 척 연기하며 사람들을 관찰했어. 너는 마귀 퇴치 의례가 피암시성이 강한 사람들의 집단 히스테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다른 한편으론 놀랍다는 생각도 했어. 사람들이 정말로 치유된 것처럼 행동했거든. 엄마도 마찬가지였어. 마음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보였어. 엄마는 휴직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복직해도 괜찮다는 진단서를 받아냈어.

너는 의아했어. 다른 교회에서는 어쩌지 못한 엄마의 병든 마음이, 왜 이곳에서는 치유가 되는 걸까 하고 말이야. 이 교회 목사는 마치 죽은 자와 교류하는 무속인처럼 말하고 행동했어.

너는 이런 심령주의를 믿지 않았지만, 이 행위가 오랫동안 인간을 지배해 온, 제의의 한 갈래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목사의 언어가 만들어낸, 치유 기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너는 강해지기 위해, 역사 속 강인한 여성들의 언어를 되뇌며 하루하루를 버텨왔어. 그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





그럼에도 너는, 엄마가 너무 많은 돈을 갖다 바치는 게 마뜩잖았어. 그래서 방문하는 횟수를 줄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 마음이 많이 회복된 엄마는 네 말에 동의했어. 너는 엄마의 의존성과 유약함이 싫었지만, 아빠에게 돈을 주느니 그곳에 헌금을 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빠는 엄마를 치유해 주지 못했으니까.

엄마는 아빠와 살 때 외로웠지만, 이젠 외로워 보이지 않아. 비록 이것이 돈 주고 구매한 심리적 도피처라고 한들, 어느 누가 비난할 수 있겠어. 세상 모든 건 주고받아야 마땅한 건데, 아빠는 받기만 했잖아.


그렇게 시간이 흘렀어. 너는 스물셋 성인이 되었고, 동생은 중학생이 되었어. 어느 날 엄마는 이전 교회에 다니던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아. 그때 듣게 돼. 아빠가 불륜녀와 재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이 소식은 엄마가 힘겹게 지켜오던 평화를 무너뜨리고 말아. 그래서 넌 엄마를 위한 복수극을 쓰기로 결심해.


아빠, 불륜녀, 목사를 마귀로 설정하고, 너의 언어로 악을 심판하겠다고 말이야. 너는 엄마의 치유 경험을 통해 알게 됐어. 한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는 데에,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 누구라도 언어로 사람을 치유할 수 있고, 심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너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언어라는 신으로 엄마를 구원하고, 마귀들을 심판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런 네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니.

어렴풋이라도 알 것 같다는 말.

이제는 믿어주겠니?


*


그런데 말이야. 확신할 수 있어? 네 언어가 엄마를 구원할지 어떻게 알아? 고작 네 생각일 뿐이잖아. 언어는 절대 신이 될 수 없어. 오히려 네 언어가 엄마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어. 아빠와 불륜녀와 목사를 심판하겠다고 쓴 언어가, 그들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다고 생각해? 과연 그들이 반성이나 할까?

네가 신이라 믿은 언어가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어. 그들의 신은 너의 언어가 아니니까. 버려진 자의 발악일 뿐이라고 여길지도 모르지. 괜한 두려움만 들통날 수도 있어.

해석은 그들이 하는 거고, 판단은 그들이 믿는 신이 내리는 거야. 너의 조악한 언어로는 그들에게 아무런 심판도 내리지 못하고, 엄마만 다치게 할지도 몰라. 엄마가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알잖아.

우리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는 엄연히 달라. 네 생각이 옳다고 믿는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할 거야. 네 언어는 엄마 마음을 태우는 불쏘시개에 불과할지도 몰라. 상처를 불로 지지면 피는 멎을지 몰라도, 가혹한 흉터가 주홍글씨로 남아 평생 엄마를 따라다닐 수도 있어. 그러면 네 마음은 어떨까. 죄책감이라는 푸른 불꽃에 휩싸여 녹아내리지는 않을까.

네 마음이 전소되면, 동생이 편히 쉴 공간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타버린 마음에 오해가 기생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멸하는 건 아닐까.

엄마와 동생이 만들어낸 언어의 집을 다시는 못 보는 게 아닐까.

네 마음이 외치는 존재의 언어를 더 이상 못 듣는 게 아닐까.

네 언어는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없을지 몰라.

네 상처는 두 번 다시 회복되지 않을지 몰라.


어쩌면 아빠도 외로웠던 게 아닐까.

돈이 아닌, 엄마에게서 소실된 사랑을 찾으러 간 게 아닐까.

너는 한때 사랑했던 아빠의 행복마저 빼앗으려는 게 아닐까.

그들은 악이 아닌데, 악이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은, 심판이라는 언어에 종속된 너 자신이 악이 아닐까.

아빠에 대한 괴소문이 떠돌았듯이, 너는 잘못 해석한 소문을 퍼트리는 감염체가 아닐까.

결국 관계는 무너지고,

너는 모든 것을 잃게 되지 않을까.


*


과제를 다 읽은 구원은 손에 든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이 공허해 보였다.

"잘 들었습니다, 구원 작가님. 과제를 다 하지는 않으셨네요."

우미의 말에 그녀의 눈에 약간 생기가 돌았다.

"네. 중재자는 제 역량으로 만들 수가 없었어요. 잘못된 게 아니라면, 선생님과 함께 만들어 보고 싶어요."
"잘못되긴요. 그러려고 수업하는 건데요. 중재자 캐릭터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구원은 망설이는 표정으로 우미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선생님을 중재자 캐릭터 모델로 삼고 싶어요."
"저요?"
"네. 허락해 주신다면요."
"허락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왜 저인가요?"
"강인해 보여서요."

우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작가님 생각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랍니다. 저도 나약한 인간일 뿐이에요."
"알아요. 모든 인간은 나약하죠. 하지만 약함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에요."
"그런가요...? 뭐, 좋습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수업이니, 기꺼이 중재자 모델이 되어드릴게요."


우미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좀 떨떠름했다. 앞으로 자신이 보여줄 모습이 구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원하는 인물처럼 행동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우미가 중재자 모델이 되어주겠다고 한 건, 그녀 혼자 풀 수 없는 문제일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구원은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과제를 읽었지만, 그녀가 써온 글 이면에선 엄청난 폭발력이 감지되었다. 오히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어떤 연유로 숨기게 된 것일 뿐.

우미는 구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랫동안 말할 수 없었던 감정의 편린이, 어느 자리에서 시작됐는지 유추해 보았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언어에서 버려진 아이의 자리가 보였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중재자로서 이야기해 보자면, 구원 작가님이 발표한 글은 끊어진 언어의 이야기 같아요. 그 언어가 다시 연결될 수 있을지, 연결된 언어가 관계도 이을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봐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미가 손뼉을 치자, 다른 수강생들도 따라 쳤다. 구원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소리가 멎자 우미가 말했다.

"다음은 차누아르 작가님."

우미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처럼 변했다. 그녀는 재건을 신기한 생명체 보듯이 쳐다봤다.

"작가님도 참 독특하십니다. 직접 발표해 주시겠어요."
"네!"

재건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우미가 손짓으로 그를 다시 앉혔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에 수강생들의 웃음이 덧입혀졌다.

강의실에 화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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