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향기, 그림자

29.

by 김빗


재건이 발표하려 하자, 우미는 급하게 할 말이 생각난 듯 그의 말을 막았다.

"작가님, 잠시만요. 죄송해요. 다른 분들이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첫 문장에 대한 부연 설명 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재건은 자기가 쓴 글을 읽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우미의 눈치를 살피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이런 말을 싸질러놨군요. 흠..."

그는 낮은 소리로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저는 제 이야기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하는 인물과 중재하는 인물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음... 제가 이런 싸가지없는 발언을 한 이유는, 내 안에서 갈등할 시간에 글을 쓰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갈등은 저 대신 캐릭터들이 하면 되니까요."

우미는 그의 당당함에 미소가 지어졌다. 독특하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멋진 말입니다. 과제를 전부 건너뛴 건 조금 아쉽지만, 작가님이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다른 작가님들도 제가 낸 과제에 무작정 안 맞추셔도 됩니다. 차누아르 작가님처럼 자기 글에 확신이 있으면, 원하시는 대로 해오셔도 됩니다. 아시겠죠?"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산발적으로 대답했다. 우미는 재건을 보며 계속 발표하라고 했다.

"네, 저는 기획안 형식으로 써봤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자기가 준비해 온 과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




[레퍼런스 작품]

1. 소설 '1984' - 조지 오웰
2. 영화 '더 랍스터' - 요르고스 란티모스


[참고한 역사적 배경]

1. 헬레니즘 시대, 지중해 세계 전반에 퍼졌던 디오니소스 제의. 특히 트라키아인들의 디오니소스 의례.

2. 고대 게르만족 전사들의 육식동물이 되기 위한 입문 의례.

3. 고대 로마제국 미트라교 신도들의 비밀 의례.




[제목]

제정신 연구소(가제)


[시대 특성]

- 배경 -

2222년 대한민국. 예의·배려·정중함이 절대가치인 세상.

인공지능이 인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하여 말과 행동을 통제한다. 공공장소나 인터넷에서 '타인에게 불편을 주는 언행'을 하면 즉각 감지된다. 과도한 감정 표현과 저급한 농담도 금지된다.

규칙을 위반하면 벌점과 벌금이 부과되어 '사회 신뢰 점수'가 하락한다. 이 점수가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지면, ‘제정신 유지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침범하지 않기 위해 심적, 물적으로 거리를 둔다.

거리에 사람은 있지만, 웃음이 없다. 대화가 필요할 땐 속삭이듯이 말한다.




- 환경 -

첨단 기술로 깨끗하게 정돈된 도시는, 절제된 미니멀리즘으로 채워져 있다. 고요함 속, 최소한의 교통소음과 생활 소음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다.


- 사회 문제 -

말과 감정을 극도로 억압한 사람 중 일부는 '제정신 증후군'이라는 사회 질병에 시달린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은 예의와 배려가 넘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을 느낀다. 때때로 자기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한다.


[로그라인]

사회가 규정한 정상적 삶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제정신 증후군'이라는 질병이 퍼진다. 이 현상은 현재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한 집권 여당의 정책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자유와 무례를 폭력의 전조 증상으로 여겨 강력하게 통제한다.

<아직 당명을 확실하게 정하지 않아서, 사회질서당 - 이하 사회당, 자유정신당 - 이하 자유당이라고 표기하겠습니다>

사회당이 집권하기 전, 무제한 자유 사회를 공표했던 자유당이 집권 여당이었다. 자유당의 정책은 젊은이들이 지켜야 할 도덕규범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당시 무례한 젊은이들에게 봉변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프리덤 포비아'에 시달렸다. 이 기묘한 사회 질병은 '제정신 증후군'과 대척점에 있으면서, 로르샤흐 반점을 한쪽 면씩 나누어 가진 것과 같았다.

'프리덤 포비아'를 앓던 사람 대다수가 사회당을 지지하여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 사회당은 국민이 서로를 배려하게 만드는 정책을 시행하자, 사회적 불만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지금은 소수당이 된 자유당은 '제정신 연구소'를 설립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감정 표현과 자유로운 삶을 돌려주려 한다.


[주제]

예의와 배려, 자유와 일탈의 경계는 누가 정하는가. 개인인가, 사회인가.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진짜 자기를 얼마만큼 드러낼 수 있는가.
개인의 책임과 양심은 자신이 정하는가, 타인이 정하는가. 아니면 국가가 규정해 주어야 하는가.


[등장인물]

1. 어영박 - '제정신 연구소' 소장

'제정신 증후군'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감정 표현과 자유로운 삶을 찾아주기 위해 '무례한 사이 돼보기' 치료법을 시행한다.

어영박 소장은 유머와 지성을 겸비했으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사람이다.

그의 진짜 목적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 어디까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지, 억압하는 사람은 어디까지 자신을 구속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그는 연구소 지하에서 비밀 실험을 진행한다. 실험 대상자는 '무례한 사이 돼보기' 우수 치료자들이다.

그는 사람이 극단적 상황에 놓이면, 짐승에게서 앗아온 얄팍한 우월성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그걸 알아보기 위해, 강도를 달리해가며 피실험자에게 고난을 내린다. 인간이 짐승으로 전락하는 순간을 관찰하려는 것이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신을 저버리는 순간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2. 예사연 - '제정신 연구소'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정부에서 파견한 '프리덤 가드' 소속 비밀 요원

사연은 환자로 위장해 '제정신 연구소'에 잠입한다. 그녀는 감정 억압의 달인이며, 예의와 배려의 화신이다. 그래서 '무례한 사이 돼보기' 치료 프로그램을 매우 힘들어한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곤경을 극복해 나간다.

사연은 우여곡절 끝에 우수 치료자로 선정돼, 지하 비밀 실험실에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한다.

그간 연구소를 몰래 촬영해 왔지만, 이곳을 폐쇄할 만한 결정적인 해악을 발견하지 못해 초조했다. 그런데 지하 비밀 실험실을 보자마자, 확실한 악의 증거라는 확신이 들어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귀고리로 위장한 초소형 카메라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지하에 오기 전, 치료사들이 준 의복으로 갈아입다가 빠진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그녀에게 카메라가 있었다면, 지하를 촬영해 실시간으로 이미지를 전송했을 것이다. 그러면 '프리덤 가드' 요원들이 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출동할 수 있었겠지만, 카메라가 없는 지금은 불가능하다.

사연은 직접 부딪혀보기로 한다. 비밀 실험에 투입된 그녀는 낮은 단계에서는 버틸 수 있었지만, 고난의 단계가 올라가자 억눌려있던 원초적 본능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3. 닥터 한 - 뇌신경의학 권위자. '제정신 연구소' 부소장

비밀 실험 총책임자. 닥터 한은 동물 실험과 인공지능 시뮬레이션을 한 후 충격에 휩싸인다. 자신이 진행하려는 연구가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학자적 호기심과 인간적 도덕성 사이에서 고뇌한다. 하지만 싱싱한 인간 실험체들을 마주하자, 지적 탐구의 욕망에 굴복하고 만다.

'진짜' 제정신 증후군 환자 케이와, '가짜' 제정신 증후군 환자 사연은 훌륭한 대조 대상이 되어줄 것이다.

그녀는 어영박 소장과 함께 본격적인 실험에 돌입한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사연을 보고 실험 중단을 요청한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 소장은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다면서 실험을 강행하려 한다. 사연은 실험이 중단되지 않자 큰 위기를 맞는다. 그 순간, 치료사 비정이 나타나 강제로 실험을 중단한다.

사연은 간신히 목숨을 구하지만, 연구소 직원들이 나타나 그녀를 억류한다. 케이와 비정도 사연과 함께 동물 우리에 갇힌다.

어 소장은 케이지에 갇힌 그들을 보며, 자신을 설득할 수 있으면 풀어주겠다고 한다.

어영박 소장, 예사연, 비정, 케이, 닥터 한은 예의와 배려, 자유와 일탈, 존재와 인권에 관한 열띤 토론을 벌인다.

어 소장과 예사연의 대립이 본격화하자, 닥터 한은 두 사람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4. 케이 - 독특한 실험 대상자

그는 '제정신 증후군' 환자로 격렬한 감정과 행동을 때때로 표출한다. 하지만 예의범절과 배려심이 몸에 뱄기에,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케이는 사연과 달리 고난의 단계를 높여도 자기를 억압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다.

그는 단계가 오를수록 동물적 본능에 자신을 맡긴다. 그렇기에 고통은커녕 황홀경에 젖은 것처럼 보인다.

어영박 소장은 케이가 실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최적의 실험체라고 생각한다.

어 소장은 비정이 실험을 중단시키지 않았으면, 케이를 곰 우리에 집어넣었을 것이다. 분노와 공격성이 극에 달한 그는, 살아있는 곰과 싸워 놈의 목을 따고 가죽을 벗겼을 것이다.

갓 잡은 짐승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죽을 그에게 덮어씌워, 고대 게르만족의 전사로 탈바꿈시켰을 것이다.

짐승의 거대한 두개골을 갈라, 하얗고 조막만 한 인간의 손으로 신선한 뇌를 파먹게 했을 것이다.

짧게 깎은 손톱에 날을 세워, 두터운 몸통을 갈기갈기 찢어 날고기를 먹게 했을 것이다.

케이는 곰의 힘을 모조리 흡수하여, 광전사 베르세르크르의 현현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연약한 인간이 아니다. 성스러운 광기에 빠진 전투 기계로 거듭났을 것이다.

어영박 소장은 변신한 케이를 경호원으로 받아들여, 축복을 하사하려 했다.





5. 비정 - 제정신 연구소 심리 치료사

비정은 뛰어난 실력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환자들에게 사랑받는 치료사다.

그녀는 투철한 직업윤리와 사명감으로 환자들을 치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비밀 실험실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녀는 아버지처럼 따랐던 어영박의 실체를 알고 괴로워하지만, 사연과 케이를 구하기 위해 그를 배신한다.


6. 그 외, 개성 강한 환자들과 연구소 직원들. 그리고 동물 실험에 이용되는 맹수들.


*


재건이 발표를 마쳤다. 우미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전에 이번 과제를 제출한 이유를 수강생들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모든 발표가 마무리될 때까지, 개별 소감은 안 들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어졌다. 구원이 중재자 캐릭터를 못 만들어왔고, 재건은 자의적으로 과제를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우미는 첫 과제부터, 수강생들에게 큰 부담을 지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과제 준비하면서 들었던 생각, 자유롭게 말해 볼까요."

우미는 수강생들을 둘러보았다. 마침, 과제를 충실히 준비해 온 태윤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태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태윤 작가님, 먼저 말해 보실래요."
"저요? 네, 네."

태윤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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