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향기, 그림자

30.

by 김빗


두 번째 눈 맞춤은 전과 달랐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땐 걱정 가득한 눈빛이었다면, 이번엔 정확한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궁금한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걸까.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무슨 생각하세요?"

우미의 말에 태윤의 얼굴이 미세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그는 눈꺼풀을 끔뻑이며 옅은 생각의 잠에서 깨어났다.


우미는 그가 자기 눈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조금 긴장됐다. 그런데 반응을 보니 전과 비슷했다. 그는 눈 뜬 채 잠들었다가 말 거는 소리에 놀라 깬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정체 모를 긴장감이 사라지자 우미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생각이 참 많으신 작가님..."
"죄송합니다.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편안하게 말씀하세요. 작가님의 솔직한 의견이 궁금해요."
"저는... 그냥 좋았어요."
"어떤 점이요?"
"할 게 생겨서요."

이번에는 우미가 할 말을 찾았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태윤이 제출한 과제가 미학적으로 뛰어나다고 할 순 없었지만, 아주 솔직했다. 보여주기식 솔직함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내용이었다.

읽는 사람에게서 심리적 보상을 바라고 쓴 글이 아니었다. 감정이 과한 측면은 있었으나, 자기 연민적 어조에 잠식되어 동정심을 유발하는 글도 아니었다. 과시적인 다짐도 없었다. 다만 자기가 가진 민감성과 독특성을 확인받고자 하는 느낌은 있었다. 공격성을 내포한 외로움도 곳곳에서 비쳤다.

짧은 글을 통해 그의 불안정한 마음이 전해져 왔다. 자기도 그런 점을 알고 있는 듯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있었다. 그렇기에 내용을 과장하거나 축소한 느낌은 없었다. 겁 많고, 부끄러움 많은 속살을 조심스레 건져내어 가감 없이 드러내 보였다.

환영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건강하지 못한 어른으로 자라난 것 같았다. 쓸데없이 웃자란 풀처럼, 속으로 파고드는 내면으로만 영양분이 스며든 것 같았다. 자기를 바라보는 마음은 비대했지만, 그 외 모든 조직은 가늘고 유약해서 언제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어쩌면 숨기고 싶었을 수도 있다. 자라면서, 자신이 소수에 속한 사람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됐을 것이다. 스스로를 정상이라 여기는 다수는 소수의 인간을 비정상으로 만들어 열패감을 심어줬을 것이다. 이 민감한 사람은 타인의 왜곡된 시선을 대범하게 웃어넘기지 못하고, 괴로워했을 수도 있다.

우미는 글쓰기에 안성맞춤인 불안정하고 감각적인 그의 정서를 인정해 주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의 과제는 훌륭했다. 자기 안으로 철수하는 사고를 조금만 기울여 밖으로 꺼내놓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야깃거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미가 보기에 태윤의 생각 구조는 다분히 자폐적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겁먹고 도망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그는 큰 용기를 내어 자기를 드러냈다. 이제 우미가 할 일은 그를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이곳은 안전해요.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비상한 감각을 가진 사람일 뿐이에요. 당신 생각은 독창적인 거지, 잘못된 게 아니에요. 당신을 이해하고 존중해요. 그러니 안심하고 마음을 열어요.'

우미는 예전 자신과 유난히 닮은 태윤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의 삶이 험난할 걸 알기에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조급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스며들어야 한다.

그녀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자, 태윤은 불안한 눈동자로 책상만 내려다봤다. 혼쭐나는 아이 같은 모습에, 우미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미안해요. 작가님이 제출한 과제 생각하고 있었어요. 너무 잘해줘서 놀랐어요. 할 일이 생겨서 다행이에요."

그제야 안심한 태윤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제가 고맙죠. 과제를 보니, 작가님은 좋은 글 쓰실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미는 가볍게 목례하고 시선을 돌렸다. 루네 작가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가 우미의 눈을 피했다. 루네는 전에 보았던 활기찬 모습이 아니었다. 어딘가 어두워 보였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미는 사실 루네가 제출한 과제를 읽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숙제하기 싫은 초등학생이 억지로 끄적인 것 같은 무성의함에 화가 나기도 했다. 안 하느니만 못한 과제였다. 우미는 그녀가 자기 눈을 피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미는 루네를 건너뛰고 수림을 보았다.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미소 지었다. 우미도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오드 작가님은 과제 준비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저는 과제가 어려워서 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아들이 도와줘서 시간 내에 할 수 있었어요. 아들이랑 같이하면서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좋았어요."
"아드님이랑 가까워지셨다니 좋은 일이네요. 그런데 과제가 많이 어려웠나요?"
"네. 저는 어려웠어요."
"너무 잘해오셔서 그렇게 생각 못했는데, 어려웠나 보군요."
"네. 이런 과제는 처음이라 더 어렵게 느껴졌나 봐요."
"어떤 점이 어려우셨나요?"
"제가 상상력이 부족해서 전체적으로 어려웠어요."
"그렇군요. 상상력..."

다음 과제도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수 있는 것인지라 우미는 고민이 컸다. 자신이 준비한 과제는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아무래도 난이도 조정이 필요할 듯싶었다.

"다음 과제는 조금 더 직관적인 걸로 내드릴게요. 이번 과제보다는 쉬울 거예요."
"아이, 참. 안 그러셔도 되는데. 쉬우면 저야 고맙죠."

우미는 마지막 사람을 향해 상체를 비틀었다. 허리를 곧게 편 채, 눈을 감고 있는 양산박이었다. 그는 우미가 자기를 볼 줄 알았다는 듯 딱 맞춰 눈을 떴다.

"작가님은 과제 안 어려우셨죠?"
"그렇소."
"그러실 줄 알았어요. 엄청난 과제를 보내주셨던데요."
"흥겨웠소."
"작가님은 글 많이 써보신 분이죠? 묘사가 너무 적나라해서 깜짝 놀랐어요."
"글은 내 몸이오. 몸이 건강해야 야시시한 이야기도 쓸 수 있는 법."
"마음보다 몸이 건강한 게 우선인가요?"
"당연한 것을! 글은 육체가 외치는 말이외다. 본인의 건강 여부와 신체 조건에 따라 쓸 수 있는 글도 다르오. 우리 인간은 육체라는 조건 때문에 사태를 관점주의적으로밖에 바라볼 수 없다고 니체 선생이 말하셨소. 육체의 욕망, 본능, 충동, 삶의 의지가 세상을 조건적으로 보게 만든다고 말이오. 또 우리가 사태를 지각하고 인식할 때, 의식의 조건으로서의 몸을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고 메를로퐁티 선생이 말하셨지. 의식이니 무의식이니 말이 많은데, 죄다 육체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란 말이오!"

우미는 그의 활력 넘치는 말투에 웃음이 났다.

"작가님!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힘이 차고 넘친다는 증좌 아니겠소! 내 나이, 지천명을 훌쩍 넘어 이순을 바라보고 있소만. 지금도 매일 새벽, 오봉산 정상까지 뛰어서 오른다오."





그의 말이 허풍만은 아닌 게, 나이에 비해 몸이 곧고 군살 하나 없이 탄탄했다.

"이 몸도 어여 발표하고 싶소만!"

양산박의 무시무시한 어리광에 몇몇 사람이 폭소를 터트렸다. 우미도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음 발표는 작가님부터 할게요."
"고오맙소!"
"뭐얼요! 자! 작가님들의 진솔한 의견을 들어봤으니까, 앞으로 참고해서 과제 만들게요. 첫 과제로 내가 쓸 이야기를 긍정하는 인물, 부정하는 인물, 중재하는 인물 만들기를 해봤는데요. 이 과제를 낸 이유를 궁금해하는 분도 계실 거예요. 미리 말을 드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네요."

우미는 잠깐 침묵하며 할 말을 정리했다.

"특별한 건 아니고요. 본디 작가는 주장하는 바가 뚜렷해야 한다고들 하죠. 자기 생각을 펼치기 위해, 이야기로 구조화해 밀어붙일 수도 있겠죠. 이럴 때, 강제로라도 반대편에 서보는 일이 필요해요. 자기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극단성을 갖고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나도 모르는 극단성이 캐릭터와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겠죠. 그런데 반대자를 만들어 둘을 갈등시키면, 자기도 몰랐던 편협함과 고착된 사고를 파악할 수 있어요. 중재자라는 완충지대를 거치고 나면 복합적인 시각도 가질 수 있고요. 저는 꼭 필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낸 건데, 어려웠다고 하니 조금 아쉽네요. 그래도 차차 맞춰나가면 큰 문제없을 거예요. 우리 조금만 휴식했다가 양산박 작가님 발표부터 시작합시다."


휴식 시간이 되자 강의실에서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남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재건은 태윤의 팔을 쳐서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둘은 화장실에 들렀다가 건물 밖으로 나가 구석진 곳으로 갔다. 재건은 전자담배를 피웠고, 태윤은 그 옆에 멀뚱히 서 있었다.

"과제 되게 잘했나 봐? 선생님이 무지하게 칭찬하던데."
"무지하게는 무슨. 좋은 글 쓸 것 같다고 한 거지."
"그게 그거지. 그나저나 루네 저 사람은 왜 표정이 안 좋냐. 전에는 엄청 밝아 보이더니."
"글쎄. 수업 시작 전에는 괜찮아 보이던데."
"그래? 내가 보기엔 수업 내내 똥 씹은 표정이던데. 뭔 일 있나? 전에 여장남자랑 같이 가더니."
"그거랑 뭔 상관이야.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런가? 아! 내 과제 들어보니 어때?"
"괜찮던데. 잘 쓰면 재미있을 것 같아."
"괜찮지? 열심히 준비했다. 기대해라. 싹 쓸어줄 테니까."
"쓸긴 뭘 쓸어?"
"놀란 너의 가슴."

재건은 손바닥으로 태윤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윤은 그의 손을 세차게 쳐내고 몸을 돌렸다.

"아야! 같이 가."

둘은 계단을 올라 강의실이 있는 2층으로 갔다. 그때 재건이 태윤을 슬쩍 치더니 눈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태윤이 그곳을 보자 구진이 복도에 서서 빈 강의실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건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뭐 훔치려는 거 아니야?"
"설마."
"한 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이잖아."
"그야 모르지."
"개가 똥을 끊냐? 두고 봐라. 저 인간 저거 분명 사고 친다."

태윤은 다시 한번 구진을 봤다. 그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긴 했다. 늘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건들거리던 그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강의실은 컴퓨터실이었다. 재건이 또 속삭였다.





"컴퓨터 다 훔쳐 가려는 거 아니야?"
"괜히 의심하지 말자. 발표 들어보니 진짜 잘살아 보려고 하는 것 같던데."

컴퓨터실을 보던 구진이 몸을 움찔거렸다. 태윤과 재건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루네가 부루퉁한 얼굴로 우미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저는 제 얘기하기 싫어요. 창작 수업인데 왜 자꾸 개인적인 일을 물어보세요?"

우미는 난처한 얼굴로 루네를 보며 달래듯이 말했다.

"신상 파악하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 수업 목표가 자기를 드러내서 해체하는 거고, 소설이라 하더라도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해서 그런 거예요"
"저는 말하기 싫다고요. 폭력이에요!"

루네는 막무가내로 떼를 쓰더니 자기 자리에서 짐과 가방을 챙겨 떠나버렸다. 우미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소란이 가라앉고 강의실이 조용해지자 우미가 말했다.

"아직 한 분 안 오셨네요."

구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재건이 손을 들어 말했다.

"복도에서 알짱거리던데, 제가 가서 데려올까요?"

우미는 그를 보다가 작게 한숨 쉬었다.

"조금 기다려보죠."


창문으로 비쳐 들던 햇살이 구름에 가리어 어두워졌다. 강의실 바닥에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화, 수,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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