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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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피의 순례
오래전 그날
피가 죽던 날
나는 듣지 못했다네
헐떡이던 네 숨소리
폐는 알고 있었겠지
말라가는 울음으로
뿌리 썩은 십자가는
홀로 땅을 파보지만
그리스도의 침묵은
닿지 못해 애달팠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조막손이 외친 슬픔
오래전 그날
그가 죽던 날
- 오드 손수림
수림이 시 낭독을 마치자, 사람들은 어색하게 손뼉 쳤다. 그녀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우미를 바라봤다.
"목소리가 너무 좋으세요. 작가님 소개, 조금 더 부탁드려요."
수림은 시를 낭독하기 전에 이름만 밝힌 후, 곧바로 쓰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신체 장기에 관한 글을 쓰고 싶고, 계속 써왔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심장에 바치는 시라며 낭독을 시작했다. 우미가 소개를 더 부탁한 건 이 때문이었다. 수림은 다시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손수림입니다. 고등학생 아이 키우는 주부입니다. 저는 신체 장기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주로 시를 쓰는데 수필이나 소설도 써보고 싶어서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필명은 <오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림은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자연스러운 손뼉 소리가 들렸다. 우미가 물었다.
"방금 낭독한 시는 어떻게 쓰게 된 건가요?"
"제가 지금은 건강해 보이지만 몇 년 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거든요. 다행히 아들이 옆에 있어서 바로 119에 신고하고 심폐소생술 해줘서 살았어요. 수술받고 입원해 있을 때, 아픈 심장을 생각하면서 쓴 시예요."
"아유, 그러셨구나."
"네, 마침 아들이 학교에서 CPR 배운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거든요."
"천만다행이었네요...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시에 나온 십자가는 뭘 상징하는 건가요?"
"심장과 혈관을 뜻해요. 십자가 왼쪽은 우심방, 우심실. 오른쪽은 좌심방, 좌심실. 그리고 십자가에 연결된 정맥과 동맥들. 제가 천주교인이라 심장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병치시켜 써봤어요."
"그렇군요. 심장 말고 다른 장기에 관한 시도 쓰시나요?"
"네. 실은 제가 알코올 의존증이었어요. 매일 술을 마셨으니 당연히 건강이 안 좋았겠죠. 심근경색 이후로, 술도 끊고 운동하면서 회복하고 있어요. 근데 운동보다 더 도움 되는 게 명상을 통한 자기 최면이에요. 내면 깊숙이 몰입하다 보면 장기들이 말을 걸어와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화 나누고, 방치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정말로 몸이 좋아져요. 그래서 장기에 관한 시를 쓰게 됐어요."
우미는 그녀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시간이 없어 소개를 마무리 지었다. 이제 마지막 수강생만 남았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수강생들이 소개할 때도 웬만해선 눈을 뜨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의자에 등 한 번 기대지 않았다. 허리도 굽히지 않았다. 마치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한 몸가짐으로 자기 자리를 지켰다.
그는 진한 베이지 정장 안에 하얀색 목폴라 니트를 입고, 밤색 세무 로퍼를 신고 있었다. 지금 당장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해도 될 것 같았다.
외피에 두른 의복은 서양식이었지만, 은은하게 풍겨오는 초연한 기운은 예스러운 선비 같기도 했다.
등 가운데까지 내려온 긴 머리카락은 가지런하게 끈으로 묶었다. 이마 뒤로 바짝 넘긴 머리칼엔 흰머리가 제법 섞여 있었다. 뿌리부터 바깥 머리까지 은빛으로 이어진 걸로 보아 평소 염색은 하지 않는 듯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모발이 가늘고 이마가 훤했다.
우미는 그가 내내 눈을 감고 있자,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박수 칠 땐 동참해서 가볍게 손뼉을 쳤지만, 그때도 눈은 뜨지 않았다.
자기 소개할 차례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없이 그를 보았다.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에 이곳저곳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우미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저기... 작가님."
"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낮고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기소개해 주실래요?"
그가 드디어 눈을 떴다. 눈은 작았지만, 눈빛이 빛났다.
"저는 필명만 공개하도록 하지요. 풍인 월등재 양산박이오. 달 월, 등잔 등, 재계할 재. 구름 낀 달밤에 바람처럼 나타나, 어둠 속 등불을 밝히는 존재외다."
그의 말투에 모두가 놀랐다. 우미는 눈을 몇 번 끔뻑이다가 물었다.
"죄송한데 작가님 말투는 평소에도 그런가요?"
"그렇소."
그의 단호한 대답은 무언가를 더 물어볼 여지를 허락지 않았다. 우미는 잠시 잠깐 생각에 잠겼지만, 금세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풍인 월등재 양산박 작가님. 필명이 조금 긴데, 부르기 편하게 줄여도 될까요?"
"그럽시다. 양산박이라 불러주시오."
"알겠습니다. 양산박은 소설 수호전의 배경 장소 아닌가요?"
"맞소. 허나 내 필명은 수호전 양산박을 뜻하는 게 아니요. 현재 양산에 살고 있고, 박씨 성을 가졌기에 양산박인 거요."
"아! 이제부턴 양산박 작가님이라고 부를게요. 작가님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할지 정말 궁금한데요."
"나는 빛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것이오. 작금의 우리 사회는 매우 경직되어 있소. 알게 모르게 어둠 속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많소. 세상은 범주를 나누길 좋아하오. 개인 취향에도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류하지. 도대체 누가 정한 것이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권이 평등하게 적용되었던 적이 있소? 생과 사, 사랑과 미움, 성스러움과 추악함. 이들은 결코 다르지 않소. 한 사람의 마음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뒤섞여 존재하오. 애초에 한 몸이란 말이오. 태초에 빛이 있기 전에 짐승이 있었소. 폭력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소. 에로스가 있었고, 타나토스가 있었소. 이 모두가 한 몸이었소. 허나 지금은 개작두로 죄다 잘라 놓았소. 양과 음, 빛과 어둠,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말이오. 이래서 될 일이오!"
격앙된 양산박이 목소리를 높이자 우미가 그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작가님 생각은 앞으로도 충분히 펼칠 수 있으니, 오늘은 구체적인 소재를 알려주면 어떨까요?"
양산박은 자기가 흥분했음을 깨달았는지, 격한 감정을 가라앉힌 후 차분하게 말했다.
"좋소. 나는 이 세상이 변태라 부르는 이들에게 인권을 찾아줄 것이오. 육체를 흠모하고, 체취를 사랑하고, 관음을 숭상하고, 욕망을 신봉하고, 음모를 어여삐 여기는 이들에 관한 글을 쓸 생각이오."
"에로티시즘 말하는 건가요?"
"그, 그렇소."
"음... 성적 코드에 잠식되지 않고 경계에 선 인간의 금기를 잘 표현하면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요. 우리 함께 만들어봐요. 열정적인 소개 들려주신 양산박 작가님께 박수 보내드려요."
[제미나이가 만들어준 이미지입니다]
손뼉 치는 소리가 잠잠해지자 우미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벌써 세 시간이 다 지났네요. 소개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두 개성 넘치는 분들이라 앞으로가 더 기대되네요. 수업 시작할 때 자료 내드렸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습니다.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강의계획서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형식적인 이론 수업은 진행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체 커리큘럼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내용을 미리 알면, 작가님들이 가진 자연스러운 상상력이 고착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과제가 나갈 건데, 매 회차 준비해 온 과제를 가지고 수업 진행할게요. 이것도 고정된 게 아니라 유동적입니다. 작가님들의 성실함과 과제 완성도에 맞추어 진행하겠습니다. 과제는 수업 이틀 전까지 제 메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질문이나 건의 사항 있으면 말씀해 주셔도 되고요. 수업과 관련된 내용이면 최대한 답변드리겠습니다. 1회 차 과제는 자료에 적어 놓았습니다. 자, 첫 수업은 여기서 마칠게요.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조심히 귀가하세요."
우미가 말을 끝맺자,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곧이어 소지품 챙기는 소리와 의자 다리 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문학 창작 과제]
- 1회 차 -
일. 본인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인물 만들기.
이. 이야기를 긍정하는 인물과 부정하는 인물, 중립에 선 인물을 등장시켜 대화시키기. 갈등하는 두 인물은 서로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반박하도록 설정. 중립에 선 인물은 두 사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중재하기.
삼. 대화가 끝난 뒤, 내가 느낀 생각과 감정을 풍경, 소리, 감각, 사물, 행동만으로 묘사하기. 직접적인 감정 묘사 금지.
사. 세 명의 인물을 합쳐, 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적 갈등 묘사하기.
*
자신을 해체하는 글쓰기.
당신이 가진 모든 관념을 의심하는 글쓰기.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