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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향기, 그림자

17.

by 김빗


그녀는 강의실에 들어올 때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우미는 그녀를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상큼함이 물씬 풍기는 순백색 원피스에 크롭핏 청재킷을 걸치고 하얀 스니커즈를 신었다. 한쪽 어깨에는 많은 휴대품을 넣을 수 있는 아이보리색 그물숄더백을 멨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는 볼륨을 넣어 양 갈래로 묶었고, 뽀얗고 통통한 볼 위에는 과하지 않은 핑크 톤의 볼 터치를 했다.

그녀는 평균 정도 키였지만 몸피가 유달리 굵었다. 살집이 많다는 느낌보다는 타고난 골격 자체가 우람해 보였다. 그럼에도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천진난만하기 그지없었다. 얼굴 위에 피어난 생글생글한 미소는 덩치만 큰 아이 같은 느낌을 주었다.

강의실에 들어올 때부터 '나 좀 봐줘요, 나 오늘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요.'라고 온몸으로 발산하는 듯했다.


우미는 다른 수강생들이 소개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집중력은 조금 떨어지는 편인지, 소개하는 사람을 보고 있다가도 금세 노트로 시선을 돌려 무언가를 끄적였다.

우미는 그녀가 소개할 순서가 되자 소위 '아빠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네! 안녕하세요!"

우미의 인사에 그녀는 큰 입을 활짝 벌려 청량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말투와 표정이 마치 '나 엄청 깜찍하고 명랑하죠?'라고 연기하는 것 같았다. 그녀와 대화하자, 우미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고양되어 목소리가 밝아졌다.

"많이 기다리셨죠?"
"네! 제 차례 기다리느라 엄청 지쳤어요."

그녀의 솔직한 답변에 강의실에는 웃음소리가 만개했다.

"미안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근데 노트에는 뭘 그렇게 적은 거예요?"
"이거요? 루네랑 대화하고 있었는데요."
"루네?"
"네.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예요."

우미는 루네가 어디에 있길래, 노트로 대화하느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그녀의 행동이 어딘가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본 적 있는데, 어디서 봤더라...? 아! 그래, 그 아이. 기억난다.'


우미가 대전에서 교습소를 운영했을 때 그녀와 비슷한 학생이 있었다. 외모는 딴판이지만 말투나 행동이 여러모로 유사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학생은 수업 때면 유명 캐릭터 인형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곤 했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고, 집중도 잘 된다고 했다.

어느 날 우미는 가족 일로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그때 학생의 인형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학교에서도 이러니?
네.
고등학생 돼도 이럴 거야?
네.
대학생 되고, 어른이 돼서도 이럴 거냐고?
네.
남자 친구 만날 때도 인형 갖고 갈 거니? 결혼해서도 남편하고 인형 하고 같이 살 거야?
왜 그러세요, 선생님. 무서워요.


우미는 그 아이의 눈물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물었다.

"작가님의 가장 친한 친구인 루네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괜찮으면 작가님 소개한 이후에 루네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우미가 루네를 존중하자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제 이름은 차이영입니다. 필명은 당연히 루네로 할 거예요! 저는 언니랑 루네랑 같이 살고 있구요. 키링을 전문으로 하는 소품샵을 운영해요. 작은 매장도 있고, 쇼핑몰도 있어요. 일은 언니가 거의 다 하지만... 대신 전 우리 쇼핑몰 전속 모델이랍니다!"

이영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짜잔, 예쁘죠? 좀비 키링이에요. 이렇게 가방에 달 수도 있고, 폰에 달아도 돼요. 아님, 집안 곳곳에 장식할 수도 있구요. 앗, 홍보 죄송해요. 이제 안 할게요. 음... 우리 루네는 제가 돌보는 좀비이자 젤 친한 친구예요. 저는 일기를 자주 쓰는데요. 주로 루네에 관한 내용이에요. 여기서 글 쓰는 법 배워서 루네 관찰기를 소설처럼 재미있게 써보고 싶어요. 이상입니다!"


소개가 끝나고, 루네가 좀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미는 수강생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태윤의 소개 때 그녀가 한 말이 영향을 미쳤는지, 사람들은 차분히 우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래요. 루네 작가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죠?"
"네, 좋아요!"

우미는 루네라는 좀비에게 섣불리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좀비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이것저것 캐묻다가는 사달이 날 게 뻔했다.

이영에게 루네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대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현실 논리로 덤벼봤자, 좀비의 실체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좀비 루네가 무엇을 은유하는지는, 앞으로 있을 여러 과제와 글쓰기를 통해 점진적으로 알아가면 된다.

오늘 우미는 딱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녀는 이영에게 다가갔다.

"키링 한 번 봐도 될까요?"

이영은 가져온 키링들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가까이서 본 좀비 키링은 우미가 예상한 디자인과는 무척 달랐다. 보통 키링이라고 하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간에 실제보다 귀엽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좀비들은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살갗, 피고름이 잡힌 피부, 뒤틀리고 변형된 치아, 벌겋게 충혈되어 튀어나온 눈알, 벌어진 입 사이로 흘러내리는 진물, 듬성듬성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피와 오물로 뒤덮인 옷.

말 그래도 좀비였다. 우미는 끔찍한 형상의 좀비 키링을 보다가 혈색 좋은 이영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산 자와 죽은 자의 대비를 선명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말투로 이영에게 물었다.

"루네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일까요? 궁금해요."
"아! 원래는 루네오스예요. 부르기 편하게 루네라고 줄였어요. 달이라는 뜻의 루네(Lune)와, 유골 보관소라는 뜻의 오수아리움(Ossuarium)을 합친 말이에요."
"멋진 말이네요. 루네 작가님이 지은 이름인가요?"
"네! 제가 지었어요."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도 궁금해요."
"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루네는 달이라는 말이지만 밤의 고요함을 뜻하기도 해요. 오수아리움은 많은 사람의 뼈를 한 번에 묻은 곳이구요. 고요한 달밤에 뼈들이 뒤엉킨 무덤은 얼마나 스산하겠어요. 우리 루네는 홀로 달빛을 받으며 망자를 애도하는 착한 아이예요. 자기도 힘들고, 지치고, 두렵지만 외로운 망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희생하는 거라구요. 우리 루네는 너무너무 불쌍한 아이예요."

이영은 말을 하다 말고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감정이 주체가 안 되는지 얼굴을 양팔에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미는 티슈를 가져와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살포시 등을 두드렸다. 이영은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았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어요. 좀비 루네는 루네 작가님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인가 봐요."
"네. 잘 걷지도 못하면서 삐걱삐걱 대길래, 단화 신으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말을 안 들어요. 일은 자기가 할 테니, 나 보고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래요... 너무 속상해요. 사람들은 몰라요, 좀비도 외로울 수 있다는 걸요."
"그래요. 앞으로 루네 작가님이 좀비 루네에게 더 잘하면 되죠.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요?"
"그러려구요. 감사합니다."

우미가 티슈를 더 건네자, 이영은 눈물을 마저 닦아내고 코를 풀었다. 코 푸는 소리가 하도 우렁차서 현재 분위기와 상반된 감정이 티슈를 뚫고 터져 나왔다. 구진은 더는 못 참겠는지 입을 막고 키득키득 댔다. 우미는 이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주어 말했다.

"자! 코도 풀었으니 다시 힘냅시다. 놀라운 소개 들려준 우리 루네 작가님께 박수 쳐 드려요."

우미는 몸을 돌려 자리로 가더니 십 분만 휴식하자고 했다. 수강생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거나, 앉은자리에서 스트레칭했다.

우미는 조금 전 대화를 복기해 보았다. 처음에는 좀비 루네가 과거의 어떤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할수록, 현재 강한 애착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영과 좀비 루네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지금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아도, 결국에는 다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일이 그렇다. 조급함은 관계를 망칠 뿐이다. 참고 기다리다 보면, 달콤한 비밀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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