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믿기지 않겠지만...'이라는 말로 운을 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믿기지 않겠지만, 저는 술을 입에도 못 댑니다."라는 말은 화자의 외모와 관련이 있다. 큰 덩치와 우락부락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술을 못 마시면 사람들은 놀라워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형이 있다. 그 형이 소개팅에 나갔을 때 상대 여성이 이렇게 물었다.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죠?"
"아뇨. 못 마시는데요."
"에이, 생긴 건 말술이신데... 뭐, 한약 같은 거 먹어요?"
"간이 알콜 분해를 못 해서 진짜 못 마셔요."
형이 이렇게 말해도 여성은 쉽사리 의심을 풀지 않았다.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라고 확신을 품고 형의 거친 외모를 지적했다.
형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어떤 마음인지 이해는 했다. 피곤할 때 거울을 보면, 몇 달은 안 씻은 것 같은 산적이 쳐다보고 있어서 자기도 깜짝깜짝 놀란다고 하니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여자는 형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내숭 떨지 않고 친한 친구 대하듯 했다고 한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지금 둘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의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이건 나와 관련된 이야기다. 오늘은 내가 서른 살이 되어 맞이하는 첫날이다. 자정이 지나서 1월 1일이 되자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뀌어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이 묘한 기분은 자고 일어나서도 계속 이어졌다.
나는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산책하러 나섰다. 오후에는 날씨가 온난한 것 같아 가볍게 입고 나왔는데, 걷다 보니 바람이 강해져서 꽤 추웠다. 나는 산책을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맞바람이 불어와 옷 속으로 파고들자, 온몸에 한기가 서렸다.
나는 상의를 단단히 여미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오른편에서 알록달록한 글자가 보였다. 떡 가게였는데 유리로 된 외관 안쪽에 흰 종이가 붙어 있었다. 사장님이 켈리그라피를 배웠는지 글씨체가 단아하고 개성 있었다.
<직접 만든, 수제 단호박식혜 판매. 식혜 짝꿍, 흑임자떡 할인 판매>
'단호박'과 '식혜'라는 글자는 진한 노란색이었고 나머지 글자는 검은색이었다. '흑임자떡'이란 글자 옆에는 떡 모양 그림이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별생각 없었는데 내 다리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한 번 더 읽어보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짝꿍? 식혜도 임자가 있는데 난 뭐람...'
그렇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서른 살이 되도록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모태 솔로다. 왜, 뻔한 말 있지 않은가. 남중, 남고, 공대, 군대, 남초 직장 트리를 타서 여자 만날 기회가 없었다고.
물론 다른 사람에 비해 연애가 불리한 건 맞다. 하지만 이 말은 자기 보호를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할 사람은 어떻게든 다 한다. 대학 동기 중에는 연애도 곧잘 하고, 결혼한 사람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그렇다면 외모가 문제일까? 외모.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술 못 마시는 형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못생겼다. 그럼에도 결혼했다.
집에 도착한 나는 이불속으로 들어가 몸을 녹였다. 생각이 이어졌다.
'뭐가 문제일까? 나는 왜 연애는커녕 여자와 대화조차 못 나누는 걸까?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색해만 하는 걸까?'
몸이 노곤했는지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 후, 눈을 떠보니 병실이었다.
작년에 허리를 다쳐 2주 동안 입원했었는데 그때 그 병실이었다. 3인실이었는데 내가 입실한 이틀 뒤 한 환자가 퇴실해서, 퇴원할 때까지 2인실처럼 사용했다. 다른 환자는 40대 남자였는데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있다가 얼마 전 일반 병실로 옮긴 분이었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의식이 있는지 눈은 뜨여 있었는데, 말도 못 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했다.
간병인은 따로 없었고, 연로한 부모님이 번갈아 가며 환자 곁을 지켰다. 기저귀 갈 때가 되면 환자의 부모님은 내게 미안해하며 잠시 나갔다 오라고 했다. 병실에 돌아오면 환기도 하고 탈취제도 뿌린 상태였지만, 희미한 변 냄새가 공기 중에 남아있었다.
회진 온 담당 의사는 환자의 부모에게 요양병원을 권유했다. 아버지는 의사 말을 따르고 싶어 했고, 어머니는 조금 더 지켜보자고 했다. 요양병원에 가면 다시는 못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들이 연애도 제대로 못 해보고 이렇게 돼서 불쌍하다고도 했다.
나는 이 얘기를 들은 후 누워있는 환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나와 같은 모태 솔로여서 그랬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퇴원할 때까지 환자는 별 차도가 없었다.
나는 퇴실하는 날 처음으로 환자의 눈을 봤다. 환자의 부모님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용기 내어 바라본 것이다. 환자도 내 눈을 마주 보았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병실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려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깜짝 놀란 나는 문손잡이를 쥔 채로 몸이 굳었다.
"어이."
한 번 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힘겹게 돌려세웠다. 누워만 있던 환자가 앉은 자세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쏟아질 것처럼 커진 눈으로 환자를 쳐다봤다. 환자는 슬쩍 웃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