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 앞이었다. 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놀랐어?"
공포에 질린 나는 입도 못 떼고 멀거니 쳐다만 봤다. 그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물 한 잔 줄래? 차가운 걸로."
나는 공용 냉장고에서 500ml 생수병을 꺼내 들었다. 두리번거리며 컵을 찾자, 그가 그냥 달라고 했다. 그는 생수병을 받아 쥐더니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동안 물을 못 마신 사람처럼 단숨에 한 병을 다 비웠다.
"캬, 물맛 좋다."
그는 아쉬운지 생수병을 거꾸로 세워, 바닥에 고인 얼마 안 되는 물방울도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나는 그의 마른 입술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더 드릴까요?"
"괜찮아."
그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미소에 긴장이 풀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근데 어떻게...?"
"어떻게 일어났냐고?"
"네."
"알면 다쳐."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당황해하자, 그가 침대 옆 보조 의자를 가리키며 나더러 앉으라고 했다. 나는 의자를 끌어와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리모컨으로 침대 위쪽을 높여 등을 기대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 모쏠이지?"
"네?"
"맞잖아."
"네."
"뭘 그렇게 놀래? 네 친구들 병문안 왔을 때 들었어. 연애도 못 해본 놈이 허리 다쳐서 어쩔 거냐고 놀리더구만."
"아..."
그랬었지. 다 듣고 있었구나.
"그 얘기 듣고 너한테 마음이 갔어."
"어! 저도 그랬는데요. 아저씨 어머님이 하는 말 듣고."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여자를 얼마나 많이 만났는데."
그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모태 솔로라는 동질감을 잃자,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톡 쏘는 말이 튀어나왔다.
"좋으셨겠어요. 여자도 많이 만나고. 그런 분이 왜 저한테 마음이 쓰였을까요? 동정심이라도 생기셨나?"
말하다 보니 나는 진심으로 짜증이 나서 얼굴을 찌푸렸다. 화도 치밀어 올랐다. 안 좋은 성격은 상황을 안 가리나보다. 나는 감정이 상해 시비 걸듯 쏘아붙였다.
"아저씨 근데 왜 반말해요? 저 아세요? 왜 반말하냐고요!"
내가 언성을 높였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성격이 그 모양이니까 여자들이 싫어하지."
"싫어하긴 뭘 싫어해요? 아저씨가 봤어요?"
"안 봐도 뻔하지, 뭐."
나는 벌떡 일어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반말하지 마시라고요."
"여자 손도 못 잡아본 병신한테 존댓말을 쓰리?"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침대 매트리스를 내리쳤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곳에 더 있다간 사고라도 칠 것 같아서 얼른 뒤돌아섰다.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너, 서 간호사 좋아하지?"
걸음이 멈췄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저 인간이 어떻게 알았을까.
"당신 뭡니까?"
"너 입원한 거 너희 부모님께 말 안 했잖아."
"그런데요?"
"네가 우리 부모님 보는 눈빛 봤어. 누워있는 나한테 애정 어린 말 해줄 때 말이야."
"그래서요?"
"우리 부모님은 나를 잘 몰라. 내가 말을 안 하거든. 그래도 날 너무 사랑해. 반대로 내 여친은 나에 대해 잘 알아. 내가 다 얘기하니까. 근데 말이야. 어떤 여친도 부모님이 주는 사랑엔 못 미치더라."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부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좋겠다, 이 자식아. 나는 그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었다.
"말 다했어요? 난 갑니다."
"서 간호사. 참 좋은 여자더라. 물론 직업윤리 차원에서 환자에게 잘하는 걸 수도 있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심성이 고운 사람인 것만은 확실해. 너한테 없는 걸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야. 잘해봐."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내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뭘 어떻게 잘해요. 방법을 모르는데."
"너 여자한테 사귀자고 해본 적도 없잖아. 여자가 너한테 호감이 있어도 네가 물러서면 끝이야. 상대방이 거절하기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다가가란 말이야. 나도 그랬고, 네가 아는 술 못 마시는 형도 그렇게 했어. 부모님은 말 안 해도 사랑을 주지만, 여자는 말 안 해주면 확신을 못 가져."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그의 눈이 꼭 내 눈 같았다. 거울 속 내 눈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눈을 보다가 병실에서 나왔다.
*
"하......"
꿈일 줄 알았다. 꿈속에선 감정 조절이 안 되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꿈속에선 불편한 감정도 망설임 없이 쏟아낸다. 과잉된 감정을 내 안에 붙잡아두지 못한다.
현실에서는 타인뿐 아니라 나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다. 이성의 힘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거친 본능이 쓰나미처럼 밀어닥친다.
부정적 감정에 닻을 달아 마음 밑바닥으로 내려보내야 하는데 꿈속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꿈이 뭐길래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
꿈은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세상인가? 꿈속의 나는 내가 아닌 너인 걸까? 아님, 현실의 내가 사실은 너인 걸까? 꿈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같은 나라고 인정해야 하는 걸까?
나는 몸을 일으켜 꿈에서 했듯이 욕하고 소리를 질러보았다.
역시나, 힘이 쭉 빠져 다시 침대에 누웠다.
슬픈 음악을 틀어놓고 눈물을 흘려보려 했다.
역시나, 눈만 더 건조해질 뿐이었다.
꿈꾼 후 잠에서 깨면 감정의 잔여물이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있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불편하다.
일어나서 움직이고 다른 일에 집중해야 축축해진 몸과 마음을 건조할 수 있다. 세상은 건조한 사람을 더 쓸모 있어하니 억지로라도 힘을 내야 한다.
꿈에 나온 그분이 생각났다. 아직 입원해 있으려나? 요양병원으로 옮겼을까? 이름이 뭐였더라. 이 씨였는데. 아! 기억났다. 이 OO.
서 간호사도 아직 그 병원에 있을까? 나한테 참 잘해줬는데.
보고 싶다. 서 간호사.
나는 조만간 시간을 내어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모든 건 운에 맡기는 수밖에.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