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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ow김정숙 Jul 01. 2024

나의 선생님(2)

선생님이 만들어준 소중한 인연

나의 선생님의 제자는 선생님의 응원을 힘입어 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전학이라는 의미는 너무 많은 변화를 요구했고 다름을 적응하는데 충격 그 자체였다.

큰 지도에도 잘 보이지 않는 섬마을에서 도시로 전학갔다. 

나는 고향과 가장 근접한 도시인 목포는 당시 교통수단인 여객선으로 8시간 정도 소요되는 먼곳이었다.

목포는 항구였고 여러 가지 의미를 안고 있는 도시였다.

나는 전학을 가기 전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 속에서 그곳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감잡을 수 있었다.

그곳에 가야만 서울도 가고 부산도 가고 꿈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크고 다양한 세상으로 연결해 주는 우리 섬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플랫폼이었다. 


내가 전학을 간 학교는 목포에서 가장 큰 학교였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살면서 겪게 된 삶의 모습은 너무 흥미로웠다. 

내가 선생님과 친구들과의 이별을 감수하고 선택한 곳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과분한 세상이었다. 

그렇게 혁신적인 선택을 받았음에도 그곳은 곧 열등감과 외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전학을 하기전 국민학교 생활은 너무 신나는 삶이었다.  그 후로도 쭈욱~~

나의 선생님과의 많은 추억들이 아우성친다.

3학년 여름 방학 때 나의 선생님의 여자 친구가 우리 섬마을에 오셨다.

섬마을에서는 여자 친구처럼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피부가 하얗고 긴 머리에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녀린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우리는 그 여자분이 선생님과 결혼할 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의 선생님은 여자 친구와 마을을 라운딩 하고 있었다.

두 분이 서로를 쳐다보며 조곤조곤 얘기 나누며 밝게 웃는 모습이 그림 같았다.

우리 동네 소꼴도 지나가게 된다는 것을 예측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삭개오처럼 높은 나무에 올라가지는 않았다.

우리 집은 큰길과 인접해 있었고 길 아래쪽에 있었다. 

우리 집 대문은 큰길에서 갈라진 곳으로 내려오다 보면 있었다.

부엌 큰길 쪽 벽에는 작은 문이 나 있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를 볼 수 없었다.

길과 집 사이에는 뒤꼍이라고 부르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텃밭 돌담에 우리 집 아이들만의 지름길이 있었다. 

대문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귀찮아서 우리가 자주 다니다 보니 길이 되어준 것이었다.

나는 뒤꼍(안) 돌담에 바짝 붙어서 나의 선생님과 여자 친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은 서로 부끄러울 수 있어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숨죽여서 선생님의 발소리를 엿듣고 있었는데 그만 들키고 말았다. 

아니 들켜주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재빠르게 올라가서 인사를 했다.

여자 선생님은 나를 보며 세상에서 처음 보는 신비한 웃음으로 인사를 해주셨다. 

나는 도시 여자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취했다. 

그렇게 하얀 얼굴을 한 예쁜 여자, 예쁜 선생님을 본 적이 없었다.

여자 선생님은 나를 보며 반가워하며 예쁘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날 이후 여자 선생님께 나의 선생님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보다 더 어울리는 한 쌍은 없을 것 같았기에.

두 분은 너무 잘 어울렸지만 우리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이듬해 두 분은 결혼을 했다.

목포에서 결혼식을 했다.

결혼식 후 처음으로 섬마을로 오시는 날 축제를 했다.

소사 선생님께서 주관해서 결혼을 축하하는 환영식을 거대하게 준비했다. 

꽃을 만들고 색종이로 꽃가루를 만들었다.

우리는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화려하게 만든 화관을 머리에 둘렀다.

우리도 천사처럼 아름다운 날이었다.

너무 잘 어울리는 두 분의 결혼을 진심을 다해 축하해 드렸다.

그리고 두 분은 우리 학교 선생님이 되셨다.

여자 선생님은 내 여동생과 남동생의 담임이 된 적이 있었다. 

나의 담임은 항상 나의 선생님이셨기에 상냥하고 부드러운 여자 선생님의 반은 되지 못했다.     


나의 선생님의 부인이신 여자 선생님의 친정집은 목포였다. 

나는 중학교 배정을 위해 뺑뺑이를 돌렸다. 

오후 5시 라디오에서 학교를 발표한다고 했다.

배정학교를 발표하는 시간에 1시간 전부터 라디오에 귀를 대고 긴장하며 기다렸다.

발표되자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배정받은 학교는 우리 동네에서는 비인기 학교였다. 

왜 비인기인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면서 나는 많이 울었다. 

아마도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가량 멀리 떨어진 곳으로써 앞으로 고생길이 열렸다고들 했다.     

나의 선생님은 나의 중학교 배정 소식을 듣고 연락을 해 주셨다.

나의 선생님 처제가 같은 학교 선배라면서 일부러 소개해주셨다.

언니 집에 초대해서 친하게 지내도록 해주셨고

언니는 학교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선생님이 얼마나 나를 아꼈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시골에 살고 있었다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못 다녔을 것이다.

중학교 갈 때도 진학하느냐 못하느냐를 선택하며 고민해야 했고

고등학교 갈 때도 그러했다. 그리고 상업계냐 인문계냐를 고민했다.

아버지는 내가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사무원이 되어 돈을 벌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나의 최종학력은 고졸이었다. 내 인생에 대학은 없었다.     

그런 나는 인문계고등학교 졸업 후 서점 점원으로 취직을 했다. 

서점에서 일이 끝나면 옥상으로 올라가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고 왠지모 슬픔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자꾸만 선생님이 떠올랐다.

“너는 어딜 가든지 잘할 거야.”

라는 말이 내 귀에 쟁쟁거렸다.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고 몸은 5kg 이상이 빠졌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너의 꿈이 무엇이었니?” 

“선생님”

“그런데 너는 지금 뭐 하고 있지?”

선생님이 되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음성이 들렸다.

선생님이 되는 길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되려면 대학을 가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도 우리 가정 형편으로는 무리한 선택이었는데, 

그래서 대학 진학은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고 꿈조차 꾸지 않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방법을 찾고 싶었고, 방법을 찾기도 전 내 마음은 벌써 대학에 가 있었다.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이미 비현실의 세계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재수를 결정한 것이다.

다니던 서점 점원 일을 그만두고 3개월 동안 공부를 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꿈을 버려가는 과정이었다면 재수하는 3개월은 꿈을 세우는 과정이었다.

점수를 내기 힘들었던 세계사, 세계지리 과목은 새롭게 재미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대학에 가지 못하더라도 꿈을 향해 나갈 수 있어서 공부가 새삼 재미있었다.

한편으로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내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

이미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교사가 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나의 선생님이 하신 격려의 한 마디 “넌 어딜 가든 잘할 거야!”라는 말씀을 믿고 싶었다. 

수많은 난관의 터널을 지나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갔다.     

대학생이 된 후 선생님을 한 번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목포 어느 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셨다.

선생님의 격려가 절실히 필요했다.

선생님이 주시는 에너지가 필요했다.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부끄러움도 있었다. 세상이 말하는 좋은 명문대학에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선생님 부부와 이야기를 한 후 돌아오는 길은 왠지 씁쓸했다. 

나의 삶과는 별개의 세계에 사시는 분들처럼 이질감도 느껴졌다.

시골에서 살 때는 사는 모습이 거기서 거기처럼 별 차이없게 보였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나의 삶은 그분들 앞에서는 가난의 극치였다.

그것을 보여드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부끄럽고 죄송했다. 

처절하게 버티며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후 선생님을 찾지는 않았다.

나의 삶을 살아 내는 데 급급했다.

방학 때마다 공장에서, 전자제품 판매원 등으로 등록금을 마련했다.

선생님이 되기 위한 학교생활은 처절했다.

그럼에도 나는 공교육기관의 선생님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학원 운영의 기회가 주어져서 학원 선생님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먼 훗날에는 전문상담사로서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나의 꿈은 멀고 까마득하게 느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30여 년이 지난 10여 년 전 어느 날 선생님의 이야기를 너무나 기적적인 방법으로 듣게 되었다.

선생님과 남동생은 경기도에서 너무 극적으로 만났다.

내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리고 **선생님을 아느냐고 했다. 

당연히 안다고 했고,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동생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그 선생님의 둘째 아들과 스터디그룹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는데 태어난 곳, 고향이 같더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기억엔 섬마을이 그리 유의미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은 너무 신기했다.

그 후 선생님 댁에 초대되어 갔는데 선생님께서 내 이야기를 해주셔서 동생은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에 반가움이 목까지 찼지만 나는 연락은 하지 않았다.

나의 소심함은 열등감에서 온 것이었다. 

‘어디 가든지 잘할 거야!’라는 말을 잘 살아 내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년 전 드디어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의 여동생은 나와 같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선생님의 여동생은 나를 기억했고 선생님의 ‘애제자’라고 말해주었다.

그때 연락처를 주고받은 기억이 났다.

2년 전 언니가 내게 처음으로 전화를 해주었다.

오빠(나의 선생님)가 목포에 오셨는데 어릴 적 이야기를 하다가 시골학교 이야기를 했고 내 연락처를 알고 있어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수십 년 만에 선생님과 나는 전화 통화를 했다. 

준비되지 않는 통화는 너무 당황스럽고 떨렸다.

나는 여전히 선생님 앞에서는 떨고 있었다.     

50년이 지난 첫 발령지 고향에서 만난 제자에 대한 기억은 있다고 하셨다. 

나에 대한 기억이 생각이 난다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그 한 마디가 감사했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그리고 선생님이 나에게 준 애정으로 내 꿈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영원한 나의 선생님이기를 바란다고, 나도 선생님의 애제자라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쑥스럽게 그날들을 기억할 뿐이었다.

“선생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낸 선생님은 훌륭하시다고,

그 이름을 높여드리고 싶었다.

먼 훗날 어려울 수 있지만, 영영 안 올 수 있지만, 큰 꽃다발 들고 찾아뵙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 진행형인 선생님의 격려가 내귀에 쟁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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