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ow김정숙 Jun 24. 2024

나의 선생님

초등학교 시절은 아름다웠다.

나의 살던 고향은 섬마을이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전교생이 100여 명이었고 우리 학년은 21명으로 다른 학년보다는 많은 편에 속했다. 내가 태어나던 해가 출산율이 높았나 보다.

나는 초등학교 가기 전 유의미한 기억은 없다. 키가 가장 작은 아이였다는 것만 주관적으로 의미 있었다.

2학년까지 받아쓰기를 열심히 한 것과 구구단을 열심히 외운 것, 그리고 한 가지 무서운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감각 속에 남아 있다. 아주 엄한 선생님, 우리는 그분을 ‘범’ 선생님이라 불렀다. 성이 ‘범’이었는지, 무서워서 호랑이 같다는 의미로 그런 별칭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분은 요즘 같으면 생활부장님이셨다. 학생들은 그분 앞을 지나갈 때 얼음이 되었던 것과 주변에 찬바람이 불었던 기억만 아스라이 남아있다. ‘범’ 선생님을 무서워하는 선배들의 행동이 전이되어 는 특별히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안 그래도 작은  키를 더욱 낮추는 데 힘을 다한 것 같다.   

              저 너머 어딘가 내 고향 섬마을이 있겠지요  


그리고 3학년이 되었을 때 나의 학교생활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갔음에 틀림없다.

새로운 선생님이 발령받아 오셨고 나의 담임이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교대를 막 졸업하시고 고향인 우리 섬마을로 발령을 받아 오셨다.

새로 오신 선생님은 3학년인 우리 반 담임이 되어주셨다.


 

작은 섬마을 학교는 교실이 세 칸이었다. 그래서 한 칸에 두 개 학년씩 합반을 했다.

선생님과 처음 만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셔서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하도록 했다.

자기소개는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4학년 언니, 오빠들부터 시작했다.

언니 오빠들, 그리고 친구들까지 소개를 했으니 약 4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내 순서가 되기까지 나는 긴장되었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느라 머리가 큰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았다. 내 좌석은 출입문을 열면 바로 맨 앞자리였기 때문에 자칫 보이지 않는 지리이기도 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숨 고르기를 하고 일어서려는데 선생님이 소개가 끝났다고 하시며 수업을 진행하려고 하셨다.

손에 땀이 나도록 긴장하며 기다렸던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저 아직 소개 안 했어요.”라고 기어드는 소리를 냈다.

너무 키가 작아서 선생님이 발견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미안하다. 네가 없는 줄 알았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너무 속상했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을 실행에 옮기며 준비한 소개를 했다.

그때 선생님의 장난기 섞인 얼굴을 기억한다.

“안 시켰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다정하게 웃어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선생님은 “콩”이라는 별명을 주셨다.

키는 작지만 콩처럼 단단하고 야무지다고 붙여준 별칭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붙여준 별칭이 마음에 들었다.

왜냐면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닌 새로 오신 멋진 선생님이 붙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눈웃음으로 웃을 때 좋았다. 칭찬을 많이 해 주시는 것도 힘이 났다.

작은 아이가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차리니 흡족해하시는 모습을 읽었다.

그리고 나를 신뢰하신다는 것을 수없이 많이 알아차렸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무엇이든지 선생님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했다.      


선생님은 엄한 분이시면서 우리에게 특별한 열정을 보이셨다.

선생님은 공부를 많이 시켰다. 학교가 끝나도 숙제를 하느라 책을 놓지 못할 정도였다.

부모님들은 잔 심부름을 시켜야 하는 상황이 생겨도 공부를 하고 있는 자녀들의 모습을 볼 때 포기하거나 미루어주는 대단한 학부모들의 교육 열의를 보이셨다.

나는 공부가 재미있었다. 특히 수학을 제일 좋아했다.

나는 수학 문제 풀이를 열심히 했다.

심지어 수학을 어려워하는 친구들을 돕는 조교 역할까지 했다.

한참 동안 거의 매일 수학 계산력 문제 100문제를 만들고 또한 풀어오라는 숙제를 거의 매일  내주셨다.

과한 처사라고 생각했으나 나는 그 활동으로 인해 계산력이 아주 좋은 학생이 되었다.

모든 학생들이 과정을 이해하게 하고 모두 다 같이 다음 과정을 가도록 하는 것이 선생님이 뜻하는 바였다.     

 

‘새벽공부’라는 새로운 프로그램도 만드셨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를 하도록 지시했다.

공부를 잘하도록 숙제를 많이 내주셨고 독서하는 습관을 만들어주셨고 독후감을 쓰도록 했다. 노력의 결과가 좋으면 칭찬으로 힘을 주셨다.

‘완전학습’이 교육방침이었던 시절이었다.

계산력, 응용력을 키우는 숙제를 하느라 노는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나는 좋았다.

다음 날 칭찬을 받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댁과 우리 집은 다른 편(소꼴과 서편)으로 조금 떨어져 있었다.

새벽에 불을 켜면 불빛이 보일 정도였다.

선생님은 솔선해서 불을 먼저 켰고 나는 그 시간을 잘 지키는 성실한 아이였다.

선생님은 불빛으로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지 파악했다.

촛불이나 등잔불을 켜면 학생들의 집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작은 마을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려는 교육 방법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학교 등교를 하기도 했고 힘들어 울기도 했다.

선생님들의 손에는 사랑의 매가 들려 있었고 불성실의 대가는 두려움과 아픔이었다..

나는 그 매를 맞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선생님의 칭찬으로 학교생활이 신났다.

멋진 선생님이 오셔서 더욱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     


선생님은 다정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은 집에 가려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에 갈 수가 없어서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이 우산을 가지고 나오셨고 집까지 데려다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거절 못하고 선생님 옆에 붙어서 걸었다. 선생님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다.

선생님의 특별한 제자가 된 것만 같아서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우리 동네는 분화구처럼 동그란 동네이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부두가 있는 곳이다.

마을 한가운데 부분은 작은 평야로 논이고, 논을 둘러서 사면에 마을이 있고 산은 마을을 포근히 안고 있었다.

북쪽 바닷가에는 부두가 있고 선착장이 있어서 모든 배들이 그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마을은 동서남북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다.

마을 이름도 단순하게 동편(동쪽), 서편(쪽), 소꼴(남쪽), 짝지뚱(북쪽)으로 불렀다.

사람들의 마음도 진실하게 다 보인다.      


5학년 때에는 도시와 농촌 간 학교를 연결하여 서로 교류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 학교는 광주에 있는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우리 반은 5학년과 6학년 합하여 40명 정도 되었고 광주의 학교의 한 개반은 60명 정도 되었다.

나는 두 명의 여학생과 펜팔을 하게 되었다.

두 친구 중 한 명과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만 편지를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소식이 끊겼다.

누가 먼저 소홀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한 명은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며, 내 삶의 풍요를 안겨주고 빛나게 해 준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와의 이야기도 할 예정이다.     


선생님은 새마을 운동을 열심히 실천했다.

꽃밭 가꾸기, 마을 꾸미기, 1인 1 화분 기르기 등을 실천했다.

지금이라면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때 화분에 대한 웃픈 추억이 불쑥 들어온다.

선생님이 화분을 하나씩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당시 도시로 나가서 살고 계신 아버지께 화분을 사서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며칠이 지나자 아버지는 화분을 사서 보내 주셨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화분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보내준 화분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움푹 파인 바가지 같은 그릇이었다.

내가 상상한 모양이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 가지고 가는 것이 너무 창피했다.

화분을 사서 보내 주라 했는데 바가지를 보내 주신 아버지가 너무 야속했다.

구멍도 뚫려있지 않는 바가지에 식물을 심으려니 친구들이 볼까 봐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만 싶었다.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지금 누구도 관심이 없었는지 특별한 기억이 없다.

나만 얼굴이 빨개졌던 것 같고 작은 몸을 숨기느라 머리가 하얗게 되었을 것 같다.

나는 바가지 화분에 바닷가에 사는 식물을 캐다가 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육이가 분명하다.

10여 전 주변에 다육이 기르는 것이 유행되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그 다육이란 것의 모양이 우리 고향 돌쩌귀밭 사이에, 산과 이어진 바위들 사이에 흔하게 조밀하게 자리 잡은 식물과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니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정겨움이 있었지만 애지중지, 그것도 값을 지불하고 키우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 고향에 가면 발에 밟히듯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나의 선생님은 나의 태양이었다.

50년 전에 나에게 와서 미래에 대한 꿈을 꾸게 했다.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끝인 줄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파문을 일으켜주셨다.

그 시대를 살아가려면 공부를 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그분의 말을 다 믿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겨야 되는 것으로 알았다.

'1인 1차 시대가 올 거야.'  '개인비행기를 타고 다닐 거야.' 등등 전기가 무엇이지, 자동차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섬마을 학교 학생들은  상상이 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셨다.

선생님의 예견은 내 생애에 다 이루어지고 있다.  

선생님은 4년간 담임을 해 주셨다.

나에게는 오로지 한 분의 선생님만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분은 나에게 약한 점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강점과 장점을 찾아주셨다.

어디서도 기죽지 않을 자존감을 길러주셨다.

내가 살아내면서 숱한 고난을 만났을 때도 넘어지지 않았던 것은 그때 근력을 길러주신 선생님의 덕이다. 선생님의 칭찬과 격려는 나를 오뚝이가 되도록 했다.

콩처럼 잘 굴러다니게 했다. 삶을 톡톡 살아내도록 했다.    

 

6학년 2학기 때 내가 먼저 선생님의 곁을 떠났다.  도시로 떠났다. 기적처럼.

아버지가 계신 지역으로 전학을 갔다. 선생님의 권유를 아버지가 받아들이셨다.

그때 선생님은 나를 기꺼이 환송해 주셨다.

친구들과 부두에 나와서 배가 멀어질 때까지 바라봐 주셨다.

그리고 “넌 어디 가든지 잘해 낼 거야. 서울에 가도 넌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한마디는 영원한 멘토가 되었다.

나의 선생님께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이전 02화 나에게도 탄생비화가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