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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ow김정숙 Sep 24. 2024

바이브레이션을 잘 하는 친구

70년대 나의 10대를 추억하며

70년대 나의 10대를 추억하며 글을 씁니다.



 내가 내 친구 심수봉을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 좋아하는 교과목을 꼽으라면 음악이었다. 나는 음악 시간이 즐거웠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이론은 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창 실기시험이었다. 시험 공지가 된 후부터 긴장되었고 잠을 자면서도 노래 연습을 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그런데 나의 목소리는 허스키했고 고음을 내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홍조 현상이었는데 그것이 나의 마음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에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홍조현상의 근원지를 생각해 보니 그때가 생각난다. 6학년 2학기 때 전학을 와서 첫 번째 음악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전학 온 지 며칠 안된 나에게 수업 중이던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고 했다. ‘낮에 나온 반달’ 노래였다. 섬마을 학교에서는 2개 학년이 합반을 하기 때문에 교과서에 있는 노래를 다 배우지 못했다. 하필이면 처음으로 들어보는 노래였다. 노래 가사는 사랑하는 고향을 떠나온 나의 마음을 비추어 주어서 좋았는데 음정 박자는 나의 맘대로 되지 않았다. 많은 친구들 앞에서 준비 없이 선생님의 지시를 따랐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으나 나는 순종의 아이콘을 달고 다녔으니 벌벌 떨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말았다.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눈을 마주치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음치 박치형 노래였던 것이다. 그 후로는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얼굴이 발갛게 되는 증상이 생겼다. 나는 노래를 못 부르는 것보다 얼굴이 홍조가 되는 것이 더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중학교에선 교단까지 나와서 친구들을 바라보며 가창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성적에 대한 욕심은 있었기 때문에 연습하고 또 했다. 노래를 못 불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얼굴만 붉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긴장을 너무 했을까? 내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갔다. 얼굴은 홍조가 아니라 백조가 되었고, 음정과 박자는 맞추었으나 고음은 힘들었다. 절친이 된 친구의 기억 속에 ‘노래 잘 못 부르는 아이’로 저장되었다. 그 친구는 목소리가 심수봉 가수님을 닮았다. ‘그때 그 사람’을 애절하게 부르며 바이브레이션을 잘했다. 나의 노래에는 없는 기교였다.      


    

내 친구 이름은 허영심이었다. 집에서 부르는 이름은 영숙인데 호적에는 ‘영심’이로 되어 있었다. 성은 ‘허’인데 말이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의 이름을 부를 때 성을 붙여 부른다.

그러나 내 친구를 부를 때는 이름만 부른다. 아예 이름을 부르지 않고 대화를 한다.

내 친구는 허영을 절대 부리지 않는다. 부모님은 왜 이름을 그렇게 호적에 올렸을까?

그래놓고 영숙이라 부른다. 어쩌라고요~~. 

요즘은 개명이 쉬우니 권해 보지만 그마저 허영이라고 거절한다. 그리고 자신도 어색한지 자신의 이름을 감춘다.     



중학교 때 우리는 이성 친구 놀이를 했다. 친구의 이름은 설영(여자역), 나는 정수(남자역) 

‘설영 씨’, ‘정수 씨’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기를 했다. 진짜 남학생이 나타나면 모르는 척 먼 산을 보거나 땅바닥을 보며 지나가는 부끄럼쟁이들.          

같은 교회를 다였고 친구는 교회 회장오빠를 짝사랑했다고 한다. 나도 그랬었나?

자존심이 강한 나는 지금도 안 그런 척했지만 어떤 오빠를 보면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크리스마스 축제 준비를 하기 위해 한 달간은 교회에 열심히 갔었다.

오빠들과 함께 하는 연습은 날마다 축제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올나이트를 했었고 부모님도 허락한 공식적 외박날이었다.

밤새 기타 치며 찬양을 하고 놀이를 하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올나이트를 완성했다.          

선물교환을 하기 위한 대상자를 뽑았던 기억도 있다.

나는 그 오빠를 위해 하얀 손수건을 샀다. 그리고 손수건에 직접 수를 놓았다. 돈을 아끼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놓았다 뜯었다를 반복하다가 구멍이 날 정도가 되었다. 결국 다시 손수건을 사서 이번에는 세탁소에 가지고 갔다. 돈은 어디서 났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메리 크리스마스, 해파뉴이어’를 영어로 써주라고 부탁을 드렸다.

필기체로 수를 놓는 기계가 빠르게 글을 썼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고마웠고.

선물 교환 시 주는 사람은 익명으로 했다. 받을 사람은 미리 뽑아서 준비했다. 

내 선물을 공개할 때 교회 오빠의 얼굴을 빤히 볼 수가 없었다. 들킬까 봐. 

그리고 그 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오빠가 원망스러워 미워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별했다.



영심이와 나는 고등학교가 달라서 함께 하는 시간은 줄었으나 우정은 영원하다고 서로를 챙겼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보거나 아주 가끔 떡볶이집에서 만났다.   


        

지금은 일 년에 한두 번 만나서 우정을 나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나를 ‘천사’라고 불러준다. 나는 그녀를 ‘심수봉’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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