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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나무 Jul 29. 2021

추억의 거짓말과 여행 금단현상

지난날은 돌아보면 모두 아름답다고들 한다. 실연과 고독, 방황과  좌절, 실수투성이 불안한 나날들로 점철되었을지라도, 돌아보면 아늑한 영화관 스크린에 반짝이며 투사되는 아련한 무성영화처럼 펼쳐지는 추억들은 미소마저 짓게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관객의 입장에서 추억을 ‘관람’할때에 한한다. 자세를 고쳐앉아 검사 또는 판사 입장이 되어 과거를 작은 부분까지 검색해보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운이 없어 들켰다면 그야말로 크게 망신을 당할 뻔했던 일들부터, 남들은 모르지만 마음에 큰 후회와 미안함의 파도를 몰고오는 일들, 충격적이던 배신의 기억 파편들까지… 다시 관객의 입장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을 들여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기억을 소환하고, 기소하고, 판결 내리는 과정을 마음속에서 거치면 자기 자신을 더 잘 파악하게 되고 반성할 부분은 반성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그저 영화 한 편과 같았던 추억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진흙속에서 찾은 진주로 변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지나간 여행들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맛있는 음식? 이국적인 볼거리? 낯선 인파속의 해방감? 공항 면세점? 현지 특산물? 모두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매력요소들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싸게 놀고 먹어서’ 아닐까. 




만약 여행을 가서 도착하자마자 호텔방 청소를 하고, 조식을 먹은뒤 설겆이를 하고, 낮동안 근처 회사에 가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고, 퇴근후 잠깐 외식 후 관광을 한다고 하면 그런 여행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에어컨디션이 잘 된 우아하고 쾌적한 호텔방과 전망이 탁트인 수영장 베드에서의 휴식, 쇼핑센터와 관광 명소들로 이어지는 투어 코스, 여유롭고 호사스런 저녁만찬 등이 아마도 필수 만족 포인트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볼 부분은, 이런 것들은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를 가도 대부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여행이라면 베트남과 태국이 크게 다르지 않고, 미국과 캐나다가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부산이나 제주도도 비슷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이래서야 기념사진 수집이 목적이 아닌한 대체 뭐하러 먼 나라를 가는지 의미를 찾기 힘들다. 호주 좋더라, 뉴욕 좋더라, 어디 좋더라, 카더라 후기는 많다. 하지만 무엇을 보고 좋다고 하는 것일까. 아무리 좋은 풍광도, 인프라도, 음식도 반년만 지나면 익숙해진다. 그나라 사람들에게는 지치고 우울하고 빡빡한 일상의 구성요소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런 ‘좋더라’는 인정하기 힘들다. 거짓말은 아니더라도 마냥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순전히 날씨 때문에, 혹은 리조트 때문에, 혹은 골프코스 때문에 해외를 나가는 경우도 많지만 이 경우엔 휴양, 스포츠 등 레저목적 방문이므로 ‘여행’의 범주와는 다르다. 휴양이나 스포츠는 정해진 활동을 하러 간다. 하지만 여행은 모르던 것을 발견하러 간다.




인생을 두고 ‘여행’ 또는 ‘여정’이라고 표현들을 한다. 그 표현 속에는 어떤 경로를 걸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일들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어 있다. Serendipity(우연)와 Fate(운명)에 대한 기대가 들어 있다. 




여행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굴 만나고 무얼 할지 모두 정해놓고 가는 건 여행이 아니다. 그건 잘해야 ‘방문’쯤 될 것이다.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운명적인 만남들 역시 기다리고 있는 모험의 길, 그런 것이 여행 아닐까.




우(연)한폐렴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행 금단증상에 시달린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어떤 항공사는 이륙해서 기내식만 먹고 유턴해오는 노선까지 만들었다고 하니 대중들의 해외여행 금단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과연 이 금단현상이 ‘여행’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비싸게 놀고 먹는 것’에 대한 것일까. 




이국적인 휴양지에서 비싸게 놀고 먹는 것에 대한 금단현상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감이 밀려온다면 정부에서 준비중인 백신여권을 가장먼저 받아서 비행기에 탑승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기다릴 필요가 없다. 삶의 환경적인 부분들이 갈수록 제약받고, 어두워지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생이라는 ‘여행’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낯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위험이, 운명적인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다. 1년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모험이 펼쳐져 있다. 가슴을 펴고, 여행을 계속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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