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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나무 Aug 11. 2021

악마를 죽이는 법

당신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자기 것’이라고 믿는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자기 소유의 것이라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몸도 마음도 ‘자기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우선 몸을 살펴보면 모든 게 명확하다. 일단 심장이나 내장 등의 ‘불수의근’은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다. 점유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면 온전한 의미에서의 ‘소유’는 아니다. 게다가 우리 몸의 온도에 대한 반응, 각종 맛이나 냄새에 대한 반응, 심지어 갑자기 뱀을 만났을 때의 반응 또한 우리는 바꿀 수 없다. 그건 그냥 고정값으로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어떤 심리학자가 인간이 갑자기 나타난 뱀에 익숙해질 수 있는지 실험을 했는데 아무리 여러 번 반복해도 익숙해지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심지어 뱀에 대한 신체의 회피 반응은 두뇌를 거치지도 않고 척수에서 반응을 명령해버리는 바람에 눈 깜짝할 새보다 반응속도가 빠르다고. 또한, 인간은 자신의 생식기에 대한 지배권도 온전히 행사하지 못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어쨌든 거기도 반정도 ‘불수의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몸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가지지 못한 덕분에 인간은 내장기관의 이상행동이나 온도나 습도, 성적인 자극 등 외부환경에 대한 신체의 반응에 오히려 거꾸로 지배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히려 내가 미리미리 내장기관들의 심기를 살펴서 적당히 눈치를 봐가며 이런저런 신체활동을 계획해야 할 정도이니 그야말로 절반의 소유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마음(두뇌)’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사람 좋은 데 이유 없다’, ‘주는 것 없이 밉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컨트롤하지 못한다. 소위 ‘마인드 컨트롤’이란 것을 백날 해봐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 우리는 싫어하는 것을 좋아할 수 없으며 좋아하는 것을 싫어할 수 없다. 아무리 ‘내 마음의 주인은 나다’라고 외쳐도 마음은 주인의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이런 현상을 ‘무의식의 작용’이라고 설명했고, 칼 융은 ‘페르소나와 부인격(Sub-personality)’라는 개념을 사용해 설명했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대부분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고 프로이트가 처음 주장한 이후 과학계는 물론 이제는 일반인들까지 무의식의 지배를 부정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칼 융의 이론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무의식의 심연에는 여러 독립된 인격이 살고 있으며 그것들이 서로 표면으로 솟아올라 나라는 존재를 지배하려고 경쟁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독립된 심연의 인격들 중에는 천사도 있고, 어린 아이도 있고, 걸식들인 식신도 있고, 섹스머신도 있고, 폭력배도 있고, 살인자도 있고, 예술가도 있고, 철학자도 있고, 애국자도 있고, 매국노도 있고, 잠을 자지 않는 자도 있고, 알콜에 중독된 자도 있다.(그 밖에도 다양하다.) 그것들이 수시로 돌려가며 튀어나오는 통에 그런 변덕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내는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혹은 권장되는 인격의 가면이 ‘페르소나’인 것이고 우리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서로의 페르소나 즉 가면쓴 인격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페르소나라는 용어는 칼 융에 의해 처음 쓰였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도 이 심연의 다양한 인격들에 대한 내용이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도 마음도 온전히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못하다. 그저 ‘그래도 웬만큼은 컨트롤이 되니까’ 내가 자유자재로 내 몸과 마음을 컨트롤하면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뭐냐고? 사실 육체의 ‘불수의근’ 정도야 큰 문제는 아닐 수 있다. 큰 문제만 없다면 그저 적당히 달래가며 살아가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무의식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있는, 고삐가 풀리게 되면 반드시 사고를 치고야 마는, 섹스머신이라던지 알콜중독자라던지, 거짓말쟁이라던지 하는 부정적인 인격들이다.




문제는 ‘천사는 갖은 노력을 해야 잠시 수면위로 머리를 내미는 정도인데 비해 악마는 잠깐만 방심하면 쏜살같이 머리를 쳐들고  밖으로 뛰쳐나온다  있다. 소위 말하는 인격수양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녀석들을 수면위로 끌어올리고 악마녀석들을 묶어두는 일이라고 보면, 그야말로 인격수양이  힘든지 (인력으로 불가능한지)   있다.




이 대목에서 힘들어하는 분들을 많이 본다. 얼마나 오랫동안 ‘생사를 건 내면의 사투’를 벌여야 하는지. 하지만 당장 이겨서 악마를 죽이는 일은 중요치 않다. 그저 사투를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몇 년만에 끝이 나기도 하고(작은 싸움들은 이어진다.), 수십 년의 싸움이 될 수도 있으며, 철학자 니체의 경우처럼 싸우다 미쳐버리는 경우도 있다.




한 가지 유효한 팁은 ‘절대로 천사들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악마들이 수면위로 나오는 것을 자주 허용하다 보면 마음의 심연에 살고 있는 천사들은 금새 비실비실 앓기 시작하고 머지 않아 식물인간이 되어버린다. 일단 그렇게 되면 승산이 거의 없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내면의 천사들을 잘 보살피고 수면위로 가능한한 끌어올려 숨통을 틔워 주어야 한다. 천사가 살아있는 한은 악마들에게 어느 정도 저항이 가능하다. 때때로 실패를 맛보겠지만 저항이 계속되는 한 승산은 있다. 멈추지 말자. 그러면서 철학, 심리학, 성경 등 원하는 공부를 하면 된다.




또 한가지, 심연에 살고 있는 악마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아야 한다. 보기 싫다고 무시해버리면 어떤 녀석들이 있는지, 개중 누가 누가 힘이 센지 알 수 없게 된다. 적을 알아야 싸울 수 있다. 따라서 내 마음속 심연에 살고 있는 악마들을 차분하게 그리고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들이 거기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다만 철학자 니체가 ‘아모르 파티’와 ‘디오니시안 애퍼메이션(Dionysian Affirmation)’에서 주장한 것처럼 그 악마들과 끌어안고 합체하려고 들면 안된다. 니체가 그러다가 자기 이름도 대답을 못할 정도로 미쳐버려서 12년간 정신병원에 갇혀 살다가 죽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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