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테마. 악인들은 항상 도덕과 정의를 내세워 빼앗고, 파괴하고, 죽여왔다는 것. 도덕과 정의를 위한다며 자기 자신만 빼고 다른 모두의 희생을 강요해왔다는 것. (지금의 '기후변화', '방역', '지속가능한 발전'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모두에게 룰을 따르도록 강요한 뒤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이너써클만 그 룰을 비껴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사사로운 정욕을 채워온 것이 인류 역사상 모든 지배계층의 공통된 역사였다. 그런 게 싫어서 양심선언을 하는 사람들은 이너써클에서 퇴출되거나 제거되어왔다. 그렇게 인류의 문명은 마치 쇠똥구리처럼 오랜 시간을 이너써클이라는 인간 똥덩어리들을 차곡차곡 굴려오면서 발전했다. 그리고 수많은 개와 돼지들은 오늘도 그 이너써클에 드는 것을 일생일대의 목표로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 바치는 중이다. 몸을 팔고 영혼을 팔아 똥덩어리에 합류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보는 일은 늘 안타깝다.
진실로 말하건대, 도덕은 필요 없다. 정의도 필요 없다. 무슨무슨 주의니 하는 이념도 필요 없다. 70억 인구 모두가 각자 자기 자신의 죄만 뉘우치면 이 세상은 그 즉시 유토피아로 변한다. 지금껏 해온 작은 거짓말들, 교활한 처세술들, 은밀한 비밀들, 더 은밀한 욕심들을 모두 뉘우치고, 이제부터는 목숨보다 양심을 더 높은 가치로 치겠다고 다짐한다면 이 세상은 유토피아에 가까운 무엇이 될 수 있다.
도덕이 뭐고 정의가 무엇인지 토론할 것도, 법을 정할 것도 없다. 양심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양심에 걸리는 일은 모두 죄’라는 생각으로 개개인이 삶에 임한다면 오히려 현행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는 악행들까지 사라질 것이다.
간통이 불법이 아니듯이 거짓말도 불법이 아니다. 남을 착각에 빠뜨려 함정으로 몰아버리는 교활한 권모술수도 법망을 피해가며 합법적으로 실행이 가능하다. 화양연화인지 화천대유인지 하는 것도 외관상으론 합법이다.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을 반복해서 하는 것도 불법이 아니고, 학교 선생님이나 성당의 신부가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하는 상상을 매일 하는 것도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양심은 이 모든 것들에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남들에게 숨긴다. ‘죄인’의 기준은 법이 아니라 양심이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 나라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나라중 하나이다. 언론은 나라에 만연한 불의가 국민들의 정의에 대한 목마름을 자극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내 해석은 좀 다르다. 나라에 불의가 가득하다는 말은 국민 개개인의 양심이 더럽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범죄자들 탓하고 정치인들 탓할 때가 아니다. 각자 스스로의 양심만 깨끗이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양심으로 주위의 눈과 귀를 밝혀주면 된다. 도덕과 정의에 대한 책은 필요 없다. 성경에 나오고 전 인류가 다 아는 십계명만 지켜도 이 세상은 유토피아다. 메모지 한 장 분량도 안 되는 십계명조차 못 지키면서 무슨 법과 도덕과 정의를 논하나. 우스운 일이다.
구약 성경의 중심 내용중 하나는 ‘인간은 신의 도움 없이 인력으로 십계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다.’이다. 대담한 주장이며, 불편한 진실이다. 스스로 양심을 깨끗이 할 수 있는지, 십계명이라도 다 지킬 수 있는지 진지하게 검토해보고 인력으로 힘들 것 같으면 신의 도움이라도 구해 보는 게 당신이 이 세상을 1만큼이라도 낫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이 타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인간이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뿐이다. 그것조차 쉽지 않다. 남에게 들려줄 가치가 있는 것이란 결국 '나라는 죄인이 어떻게 양심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증언'이지 도덕이나 정의같은 거대담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