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불리수(內不離秀)』 | 조선 선비 이연의 가문소설 큐레이팅
역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로 되살아난다지요. 사극 드라마만 보아도 그렇소.
〈용의 눈물〉(KBS, 1996~1998)에서 〈대장금〉(MBC, 2003~2004), 그리고 〈옷소매 붉은 끝동〉(MBC, 2021)에 이르기까지—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서사의 원천으로 살아 숨 쉬고 있소. 시대는 바뀌어도 사람들은 과거의 이야기 속에서 현재를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겠지요.
조선 후기에도 역사와 상상력을 결합한 방대한 국문 장편소설들이 널리 읽히고 있었소.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들이 조선에서 창작되었음에도 한반도가 아닌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와 같은 중국 왕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오. 낯선 시공간을 빌려, 인간의 욕망과 질서를 보다 자유롭게 그려내려는 선택이었겠지요.
〈현씨양웅쌍린기〉, 〈소현성록〉, 〈화산선계록〉, 〈명주보월빙〉… 이름부터 낯설고, 분량 또한 상상을 뛰어넘지요. 수십 권은 예사요, 많게는 백 권을 훌쩍 넘는 작품들도 적지 않소.
심지어 어느 사대부가 여인이 지었다는 〈완월회맹연〉은 무려 180권에 달하여, 오늘날의 장편소설과 견주어도 결코 그 규모에서 뒤지지 않을 정도라오. 이처럼 방대한 분량은 곧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폭과 깊이를 짐작하게 하지요.
이 작품들의 진짜 특징은 이야기의 중심이 한 개인의 일대기에 머무르지 않고 한 가문 전체의 역사로 확대된다는 점이었지요. 한집안에 속한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니, 사건 또한 자연히 복잡하고 다채로워졌소. 부부나 아내들 사이의 갈등에서부터 고부 사이의 긴장, 혼사를 둘러싼 각종 음모와 방해까지… 한집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사건과 갈등이 이야기 속에서 쉼 없이 펼쳐지지요. 그래서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러한 조선 후기의 장편소설을 ‘가문소설’이라고도 부르고 있지요.
내가 살던 조선 후기, 이 작품들은 흥미진진한 사건과 방대한 서사 전개로 큰 인기를 누렸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통속적인 이야기들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쉽게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했지요. 이야기 속에 빠져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던 궁중과 규방의 여인들… 그 몰입과 열기는 오늘날 그대들이 말하는 페이지 터너(page-turner)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오.
자, 이제 화려하고도 격정적인 가문소설의 이야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봅시다.
한 집안의 흥망과 번영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소. 세계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명작인 〈대부 The Godfather〉(1972)를 떠올려 보시오. 아니,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소. 몇 해 전 큰 화제를 모았던 〈재벌집 막내아들〉(JTBC, 2022) 또한 재벌 총수 일가를 둘러싼 권력과 후계 다툼을 그리며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요.
앞서 살폈듯이, 한 집안의 역사 속에서 사랑과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이 얽히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오. 이러한 서사는 이미 조선 시대의 장편소설 속에서 장대한 규모로 펼쳐지고 있었지요.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 있으니, 바로 〈소현성록(蘇賢聖錄)〉이오.
17세기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오랜 시간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등장한 수많은 가문소설의 서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소. 오늘날 학자들은 이 작품을 ‘가문소설의 효시(嚆矢)’라 부르며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요.
이야기는 중국 송나라 태조 때에서 시작되어 네 번째 황제 인종 연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오. 그러나 이 작품이 송나라 전기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오. 역사적 무대를 빌리되, 그 위에 소씨 집안이라는 허구의 가문과 인물들을 세워 조선 소설 특유의 상상력과 개성을 마음껏 펼쳐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장대한 소씨 가문의 이야기는, 기이한 한 인물의 탄생으로 시작되오. 자, 이제 〈소현성록〉의 서사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송나라 태조(太祖, 재위 960~976) 때, 학식과 덕망이 높은 소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황제는 다섯 차례나 사신을 보내 그를 불렀으나, 소광은 끝내 벼슬을 마다하고 자운산 자락에 은거하며 세속을 떠난 삶을 살았다.
손이 귀한 집에서 8대 독자로 태어난 그는 현숙하기로 이름난 양씨를 아내로 맞았으나, 십여 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이에 양씨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개국공신인 석수신(石守信)의 첩이 낳은 딸 석씨와, 양가의 딸 이씨를 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세 여인 모두 수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조차 이를 안타까워하며 하늘을 원망할 정도였으니, 자운산 자락에는 늘 침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기쁜 일이 찾아왔다. 양씨가 잉태하여 월영과 교영 자매를 연이어 낳은 것이다. 더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광과 양씨 부부는 같은 날 같은 꿈을 꾸게 된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관(仙官)이 아들을 점지하는 꿈이었다. 두 사람은 이를 길조로 여기며 다시 찾아온 잉태를 기쁨 속에 맞이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본래 몸이 약하던 소광이 아내가 잉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집안은 다시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열 달이 지나도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 열한 달, 열두 달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점차 불안해졌다. 혹시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애초에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이 태어나는 것은 아닌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소광의 소상(小喪)이 지난 뒤였다. 양씨가 갑자기 해산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잉태한 지 꼭 열네 달 만이었다. 이는 누구도 본 적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집안사람들은 놀라움과 경외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두려워했고, 어떤 이는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그러나 곧 입을 모아 말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다. 반드시 집안을 다시 일으킬 인물일 것이다.”
보름달같이 환한 얼굴에 옥같이 빛나는 살결, 그리고 남다른 기골을 지닌 아이를 본 양씨는 오랜 슬픔을 털어내며 힘주어 말했다.
“하늘이 우리 소씨 집안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셨구나. 이 아이가 반드시 집안을 일으킬 것이다.”
그 아이가 바로 훗날 소씨 가문을 북송 최대의 명문가로 만든 소현성이다.
세월은 유수(流水)와도 같아 어느덧 십여 년이 흘렀다. 장녀 월영은 한씨 집안에 시집갔고, 둘째 교영은 이생과 혼인했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교영의 시아버지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생 또한 연좌되어 형장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교영은 겨우 목숨을 건져 서주로 유배되었다. 떠나는 딸을 배웅하며 양씨는 『열녀전』을 건네며 정절을 지키라 당부했다.
삼 년 뒤, 다행히 시아버지의 억울함이 밝혀지면서 교영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그 뒤에 있었다. 교영은 유배지에서 알게 된 이웃 남자 유장과의 인연을 끊지 못했고, 끝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보낸 독주를 받고 생을 마감한 것이다. 자식보다 가문의 명예가 앞섰던 시대의 비정한 모정(母情)이었다.
한편, 소현성은 열네 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며 일찍이 이름을 떨친다. 월영의 남편 한생 또한 급제하여 두 사람은 나란히 벼슬길에 오른다. 이듬해, 소현성은 평장사인 화현의 딸 화수은과 혼인한다. 화수은은 아름답고 투명한 사람이었으나 온순하거나 품이 넓고 인내심이 강한 인물은 아니었으니, 집안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소현성만 못하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씨가 소현성을 찾아와 아름답고 현숙하기로 소문난 자신의 친정 조카인 석명혜를 둘째 부인으로 들이라 권한다. 우연히 이 말을 들은 화수은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석씨를 찾아가 거칠게 항의한다.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남의 인생을 휘젓는 것도 분수가 있지! 다시 그런 말을 꺼내면, 서모라도 가만두지 않겠소!”
이 일로 집안이 크게 술렁인다. 소현성은 어머니뻘인 석씨에게 예를 잃은 일을 그냥 넘기지 못해, 노기를 참지 못하고 화수은의 유모를 엄히 다스린다. 그리하여 여덟 달이 넘도록 그녀의 처소를 찾지 않는다. 그러다 어머니의 권유로 화수은이 둘째 아이를 낳을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마음을 푼다.
그러나 인연은 끝내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소현성과 석명혜의 혼담은 이루어졌고, 야속하게도 양씨 부인은 투기를 경계해야 한다며, 소현성이 혼인날 입을 옷을 화수은에게 직접 짓게 했다. 혼인날,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기품있는 석명혜의 모습을 본 화수은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안 소현성은 신방에 들지 않고 그날 밤 내내 화수은을 돌본다.
시간이 흐른 뒤, 석씨는 우연히 석명혜의 팔에 또렷이 남아 있는 앵혈을 보게 된다. ‘앵혈(鶯血)’은 여인의 팔에 새기는 표식으로, 정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혼인 후에도 이 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은, 석명혜가 얼마나 절제된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이후 석명혜 또한 아들을 낳았고, 화수은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황제의 명으로 여옥화가 세 번째 부인으로 들어오면서, 소씨 집안 위로 서서히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여옥화는 황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 여귀비의 조카였다.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른 소현성을 사위로 삼고자 한 아버지 여운의 뜻에 따라, 소현성의 셋째 부인이 되었다. 화려한 미모를 지녔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질투와 교만이 가득했다. 겉으로는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화수은과 석명혜를 내쫓을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시댁을 떠난 여옥화는 유모와 장정 몇을 데리고 강주 땅 만춘산으로 향한다. 깊은 산중의 동굴에는 요망한 약을 만든다는 도화진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거금을 주고 사람의 얼굴을 다른 이로 바꾸는 ‘개용단(改容丹)’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회면단(回面丹)’을 손에 넣는다.
이후 소씨 집안에서는 기이한 일이 잇달아 벌어지기 시작한다. 어느 날, 양씨 부인의 방 평상 아래에서 석명혜의 필적으로 보이는 글과 함께, 나무 인형 등 저주에 쓰이는 물건들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양씨 부인은 무슨 까닭인지 시비들을 단속하여 이 일을 덮게 한 뒤 조용히 말했다.
“집안에 독한 여자가 착한 사람을 모함하는구나.”
며칠 뒤, 양씨 부인의 생일잔치가 열렸다. 사흘에 걸쳐 이어지는 잔치에서 둘째 날은 석명혜가 술잔을 올리는 날이었다. 석명혜는 단정한 몸가짐으로 공손하게 술잔을 올렸다. 그런데 기뻐하며 이를 마신 양씨 부인이 곧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모습을 본 소현성은 크게 놀라, 혹 술에 독이 든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석명혜의 시녀들을 잡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양씨 부인이 이를 막으며 일이 더 커지지는 않았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여옥화가 꾸민 일이었다. 그러나 진짜 음모는 이제부터였다. 여옥화는 개용단을 먹고 석명혜의 얼굴로 변한 뒤, 늦은 밤 외당에서 글을 읽고 있던 소현성을 찾아간다. 그리고 입에 담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대가 나를 멀리하시니 내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했소. 내가 낳은 아이들도 모두 그대의 씨가 아니오. 어머니 방에 요물을 숨긴 것도, 생신날 술에 독을 탄 것도 모두 나요. 그대는 어찌 집안일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시오?”
분노한 소현성은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하인들을 불러 석명혜와 그 자식들을 모두 내쫓고, 그녀가 지내던 벽운당까지 헐어버린다.
여옥화의 계략은 성공한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소현성이 외당에 머무는 날이면 화수은의 얼굴을 하고 와 교태와 음란한 말로 그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화수은에 대한 소현성의 굳은 신뢰도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그때 뜻밖의 전환이 찾아온다. 자운산을 찾아온 소현성의 친구인 임보수가 강주에서 가져왔다며 기이한 약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 약을 먹으면 얼굴이 바뀌고, 이 약을 먹으면 다시 본래 얼굴로 돌아온다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현성의 머릿속에 지금까지의 일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그날 밤. 외당에 나타난 화수은을 본 소현성은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화수은의 처소인 녹운당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진짜 화수은이 단정히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두 여인이 마주 선 순간, 모든 의혹은 확신으로 바뀐다. 소현성은 곧장 동그란 약을 반으로 갈라 두 여인의 입에 넣게 했다. 그것은 임보수가 가지고 있던 회면단이었다. 약을 삼키는 순간, 가짜 화수은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듯 변하더니 이내 여옥화의 얼굴이 드러났다. 모든 음모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소현성은 그날로 여옥화를 소씨 집안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얼마 뒤, 누명을 벗은 석명혜는 자식들과 함께 자운산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소씨 집안은 다시 질서를 되찾는다.
세월이 흐르고, 소현성은 불과 스물다섯의 나이에 우승상의 자리에 오른다.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한 데 이어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출세는 실로 이례적인 것이었다. 화수은과 석명혜 또한 각각 ‘경국부인’과 ‘조국부인’의 직첩을 받는다. 화수은은 5자 2녀를 낳았고, 석명혜 또한 5자 3녀를 낳았으니, 자운산 아니, 중원에서 이처럼 영화롭고 번창한 가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자식들 또한 대부분 명문가와 혼인하여 큰 탈 없이 평탄한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모든 인연이 그러하듯, 그 가운데에는 순탄한 길에서 벗어난 삶도 있기 마련이오. 자식들뿐 아니라 그 집안으로 들어온 이들 가운데서도, 사랑과 혼인, 그리고 가문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유난히 굴곡진 삶을 살아간 이들이 있었으니, 이제 그 몇몇 자손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자녀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어느 날, 소현성은 문득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소광을 떠올린다. 그때 남양 사람인 승상 위의성이 자운산을 찾아와, 선친이 그렸다는 소광의 화상을 건넨다. 소현성은 가족들과 함께 그 그림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에 잠겼고, 이후 그 화상을 사당에 봉안한다. 이 일을 계기로 소현성과 위의성은 마음을 나누는 벗이 된다.
위의성에게는 전처 강씨에게서 얻은 큰딸 선화와 아직 어린 유양과 유승 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강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후 위의성은 방씨를 후처로 들여 아들 유흥을 얻었다. 문제는 방씨였다. 겉으로는 공손했으나, 속으로는 독사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날이 쇠약해지던 위의성은 자신이 죽은 뒤 전처 자식들이 계모에게 시달릴 것을 염려하여, 딸 선화를 소씨 집안에 시집보내기로 결심한다.
이후 자운산을 찾은 위의성은 소현성의 장자인 소운경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혼인을 청한다. 양씨 부인과 소현성도 이를 받아들여 두 집안의 혼인이 정해진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혼인을 약속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위의성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임종을 앞둔 그는 계모의 화를 피하고자 유양과 유승의 스승이었던 승상 구준을 불러 아들 형제를 부탁하고, 딸 선화에게는 위급할 때 열어 보라며 밀봉한 편지를 건넨 뒤 곧 숨을 거둔다.
위의성이 세상을 떠나자, 방씨는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다. 시도 때도 없이 선화를 매질하고, 구준의 집에 사람을 보내 유양과 유승을 해치려 한다. 급기야 선화를 자신의 조카에게 첩으로 보내려까지 한다. 우연히 방씨의 흉계를 들은 방씨의 어린아들 유흥은 깜짝 놀라 이 사실을 선화에게 전한다. 놀랍고도 답답한 마음에 선화는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꺼내어 펼쳐 본다.
“방씨가 너의 혼사를 휘저을 것이니, 위험이 닥치면 남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시비 영춘과 함께 집을 떠나 자운산으로 가거라.”
밤이 되자 위선화는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남자의 옷을 입은 뒤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낯선 젊은 선비가 서 있는 듯했다. 위선화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영춘과 함께 집을 빠져나와 자운산 소부(蘇府)로 향했으나, 길을 잘못 들어 산속에 있는 한 도관에 머물게 되었다.
한편, 집을 나간 위선화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소운경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산중을 거닐다가 우연히 한 도관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는 ‘위유양’이라는 이름을 한 선비가 책을 읽고 있었다. 단정한 모습과 기품 있는 말씨. 운경은 그를 바라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낯익음을 느낀다. 그리고 번개처럼 깨달았다. 눈앞의 선비가 바로 위선화라는 것을.
운경은 즉시 집으로 돌아가 어른들께 이 사실을 알렸고, 소현성은 위선화를 방씨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 보호한다. 그 사이 방씨는 위씨 형제까지 독살하려 했으나, 형제는 다행히 구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비극은 다른 곳에서 터진다. 방씨의 악행을 더는 견디지 못한 유흥이,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방씨는 악행을 멈춘다.
세월이 흘러 위의성의 삼년상이 끝난 뒤, 소현성은 마침내 소운경과 위선화를 혼인시킨다. 이로써 위선화는 방씨의 화를 딛고 소씨 집안의 맏며느리, 곧 종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후 위씨 형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운경과 선화 부부 또한 화목하게 백년해로한다.
이처럼 장자 소운경의 혼사까지 무사히 마무리되자, 소씨 가문은 다시 안정을 되찾는 듯 보였소. 그러나 한 집안의 영화가 언제나 평온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소현성의 자식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기질이 사납고 운명이 험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셋째 아들 소운성이오. 이제부터 이 집안의 서사는, 한층 더 거세고 복잡한 물결 속으로 접어들게 되오. 소운성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다음 편을 열어 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