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불리수(內不離秀)』 | 조선 선비 이연의 가문소설 큐레이팅
현생에서 맺지 못한 사랑이 전생으로 이어지고, 죽음을 넘어 다시 만나게 되는 인연… 요즘 드라마에서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 아니겠소?
<환생–Next>(MBC, 2005)에서는 시대를 넘나드는 사랑이 펼쳐지고, <별에서 온 그대>(SBS, 2013~2014)에서는 400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만난 인연이 그려지지요. 또한 <푸른 바다의 전설>(SBS, 2016~2017)과 <도깨비>(tvN, 2016~2017) 역시 생을 거듭하며 이어지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소.
이처럼 이야기의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있소. 바로 전생의 인연이 현생으로 이어진다는 ‘환생담(還生談)’이오.
육신은 사라져도 정신과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태어나 인연을 이어간다는 믿음— 이것이 곧 환생이라 할 수 있지요.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서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과 사랑, 운명과 시간의 의미를 되묻곤 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결코 근래에 생겨난 것은 아니오. 이미 18세기, 조선의 국문 장편소설에서도 생을 넘어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가 창작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옥환기봉(玉環奇逢)>이라오.
이 작품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중국 후한을 배경으로 광무제와 두 황후—곽 황후와 음 황후—의 사랑과 갈등을 그려낸 이야기요. 그리고 그 장대한 서사는 더 거슬러 올라가 전한(前漢) 무제의 시대에서부터 시작된다오.
자, 이제 한나라 황실을 무대로 펼쳐지는 <옥환기봉>, 그 기묘하고도 깊은 인연의 서막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때는 한나라 무제가 천하를 호령하던 시기였다.
무제와 위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여태자 유거는 공손하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태자비가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자 후궁 사씨를 들여 아들 유양을 얻는다. 이로써 황실의 대를 이을 계통은 유지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궁중의 분위기는 서서히 변해 간다. 무제가 위 황후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자 젊고 아름다운 조씨를 총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씨에게서 또 다른 황자 유불릉이 태어나자, 궁중의 권력 구도는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틈을 노린 인물이 바로 간신 강충이었다. 그는 조씨의 편에 서서, 황제에게 위 황후와 여태자를 끊임없이 참소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제는 꿈속에서 수천의 목인(木人)이 자신을 해치려 드는 괴이한 광경을 보게 된다. 이 말을 들은 강충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 그는 여태자의 거처에 목인을 몰래 숨겨두고, 무제가 태자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믿게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무제가 병환으로 감천궁에 머무는 동안, 그는 여태자의 출입마저 막아 부자 사이의 오해를 더욱 깊게 만든다.
결국 궁지에 몰린 여태자는 누명을 벗고 강충을 처단하고자 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강충의 무리였던 환관 소문은 이를 무제에게 ‘여태자의 반란’이라 고한다.
노여움이 극에 달한 무제는 위 황후와 공손비는 물론, 황태손 부부에게까지 자결을 명한다. 쫓기던 여태자 또한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뒤늦게 모든 것이 강충과 소문의 모함이었음을 알게 된 무제는 깊은 슬픔과 회한에 잠긴다. 그는 여태자가 죽은 자리에 ‘사자궁(思子宮)’을 세우고, 날마다 아들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무제의 꿈에 위 황후가 아들 부부를 데리고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이 아이들은 본디 천하 강산의 주인이 될 운명이었으나, 억울하게 요절하여 그 한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이에 상제께서, 훗날 백성이 도탄에 들 때 이 아이들이 성상의 자손으로 다시 태어나 망한 한나라를 일으키고 다하지 못한 인연을 이루게 하시리라 하셨으니, 부디 이를 아소서.”
시간이 흘러, 한나라의 신하 왕망이 평제를 독살하고 국호를 ‘신(新)’으로 바꾼 신망의 시절. 천하는 어지러웠고, 한나라는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무렵, 훗날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후한의 첫 황제가 되는 청년 유수가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밖으로 떠도는 두 형을 대신해 백수촌에 남아 농사를 지으며 집안을 지탱하고 있었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유수는 두 살 아래의 곽 씨와 혼인한다. 곽 씨는 왕가의 혈통을 이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보리죽으로 끼니를 잇고 손수 밭을 갈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홀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까탈스러운 세 시누이와도 화목하게 지냈으니, 이는 남편 유수를 향한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느 날, 유수는 그녀의 지극한 마음에 감복하여 우스갯소리로 훗날 황제가 되면 부귀영화를 안겨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곽 씨는 그 말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조용히 속내를 털어놓는다.
“빈천함과 곤궁함은 백 년이라도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 부귀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군자께서 훗날 큰 공을 이루시면 다른 여인을 품을까 걱정이오니, 평생 첩을 두지 않으시길 원할 뿐입니다.”
뜻밖의 말에 유수는 태연히, 이미 다른 여인을 만난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 순간, 곽 씨의 마음은 무너져 내린다. 그녀는 밥그릇을 내던지며 끝내 눈물을 쏟고 만다.
그즈음, 곽 씨는 유수의 옷을 빨다가 주머니 속에서 영롱한 옥환(玉環), 곧 옥으로 만든 가락지 하나를 발견한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가슴 깊이 스며든다.
유수는 열세 살 무렵, 깊은 산속에서 천태산의 선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선녀가 건넨 신비로운 액체를 마시자, 그는 전생에 자신이 한나라 무제 시절 억울하게 죽은 여태자 유거였음을 깨닫는다. 그때 선녀는 ‘天’ 자가 새겨진 옥가락지를 건네며 이렇게 일러주었다.
“머지않아 ‘地’ 자가 새겨진 옥가락지를 지닌 공손비를 만나, 다하지 못한 인연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전생에 그대의 자식을 낳았던 사 씨와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니, 이를 잊지 마소서.”
그 순간 유수의 눈앞에 떠오른 사 씨의 모습은, 놀랍게도 지금의 아내 곽 씨와 꼭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편에는, 언젠가 공손비의 환생을 만나게 되리라는 예감이 점점 깊어져 갔다.
이후 유수는 곽 씨 친정의 도움을 받아 누이의 남편 등신과 함께 장안으로 올라가 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훗날 자신과 함께 한나라를 다시 일으킬 스물여덟 장수를 만나게 되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운대 28장’이라 부른다.
그러던 어느 날, 유수는 우연히 왕망과 마주친다. 평제를 독살하고 왕조를 빼앗은 장본인이라는 생각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그는 순간 활시위를 당긴다.
이 일로 왕망의 군사들에게 쫓기게 된 유수. 이후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곽 씨는 절망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러나 유수는 무사히 돌아왔고,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 밤, 유수는 곽 씨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월궁 항아가 온다 해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소.”
그 말을 들은 곽 씨는 무너지듯 고개를 떨군다. 가슴 깊이 내려앉았던 불안이 조금씩 풀리며, 한참을 남편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하지만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수는 자신이 황제가 될 운명을 암시하는 비서(秘書)를 접하게 되고,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마침내 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첫 싸움은 참혹했다. 둘째 형과 누이가 목숨을 잃고, 어머니와 남은 가족들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다. 그때, 전장에 말을 타고 뛰어들어 가족을 구해낸 이는 다름 아닌 곽 씨였다. 연약한 몸으로 싸움터에 나선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유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후 유수는 연전연승을 거두며 세력을 키워 나갔고, 마침내 한나라 군사들은 유현이라는 자를 황제로 옹립하였으니, 역사는 그를 경시제(更始帝)라 부른다.
이 무렵, 곤양과 정릉을 평정한 유수는 신야를 지나던 길에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음려화. 그녀의 손에는 ‘地’ 자가 새겨진 옥가락지가 들려 있었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 반지가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 부친이 꿈에서 선녀에게 받은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때 선녀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곧 태어날 딸은 여태자 유거의 아내 공손비의 환생이니, 다른 한 짝을 지닌 여태자의 환생과 만나 다시 부부의 연을 맺게 될 것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수의 마음은 크게 흔들린다. 더구나 눈앞에 선 음 씨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멀리서 보면 밝은 달 같고, 가까이 다가서면 한 송이 꽃처럼 고왔다. 가녀린 몸매에 고결한 기품까지 갖추었으니, 천고의 성녀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다.
결국 유수는 이를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여기고, 그녀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그러나 그 선택은, 또 다른 균열의 시작이었다. 처음 음 씨를 마주한 곽 씨는, 그 아름다움과 기품을 인정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요망한 것이, 미색으로 남편의 마음을 흔들었구나.’
그날 이후,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만 보아도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날이 갈수록 남편이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점점 커져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지고, 성정 또한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 간다.
이로부터의 일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니, 뒷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샆펴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