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가방의 진실”

– 기억은 흐릿했지만, 요구만은 또렷했다.

by 굥스

지하철 종착역은 유실물의 블랙홀이다.
전날 접수된 분실물들을 정리해 유실물센터행 열차에 실어 보내고 나서야 겨우 한숨 돌린다.

시간은 이미 오전 10시.
유실물은 한참 센터로 향하고 있을 시각이었다.


“빨간 가방을 잃어버렸는데요, 거기 있죠?”
처음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별다른 것 없는 유실물 전화를 찾는 보통의 목소리였다.
그때는 몰랐다. 이 통화가 긴 싸움의 시작이라는 것을.


전날 접수된 유실물 목록을 다시 확인했지만 ‘빨간 가방’은 없었다.
센터로 이미 이관된 목록에도 그런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규정상 전날 접수된 물건은 당일 센터에서만 확인 가능하다는 안내를 드리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당연히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시작은 그다음이었다.


잠시 후, 다시 걸려온 전화.
그 어르신이 말한 ‘빨간 가방’은 알고 보니 검은 바탕에 빨간 무늬가 있는 가방이었다.
오늘 아침, 내가 직접 열차에 실어 보낸 수많은 물건 중 하나였다.


“전날 접수된 물건이라 이미 센터로 이관되었습니다.
확인은 유실물센터에서 가능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점점 커져가는 목소리와 함께 요구도 커져갔다.


“왜 마음대로 보냈어요? 내가 왜 거기까지 가야 해?
지금 내가 있는 곳으로 보내줘요!”


절차를 설명했다.
전날 접수된 물건은 다음 날 유실물 열차로 반드시 이관해야 한다는 규정을.


그러나 어르신은 어떤 설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30분 넘게 이어진 실랑이.
그리고 또 새로운 주장을 꺼내 들었다.


바로 “현금 실종설”이었다.

“그 가방에 현금 13만 원이 들어 있었는데, 없어지면 당신들이 책임져! 나 가만 안 있어!”


유실물 인계사항에 해당 내용은 없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감정을 눌러 담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이관 후 내용물 확인은 저희 권한 밖입니다.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면 경찰에 정식 신고를 하셔야 합니다.”

‘경찰’이라는 단어에 잠시 주춤하더니,
어르신은 또 다른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신고는 됐고! 내가 센터까지 가는 이 고생은 누가 보상해? 내 시간값은?”


허탈했다.
물건을 잃어버린 본인의 책임은 온데간데없고,
규정대로 처리한 직원이 오히려 ‘불편의 원인’이 되는 논리.


규정은 왜 존재하는가.
이런 억지 속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고,
상식대로 행하기 위해서다.



만약 규정이 없었다면
나는 그 ‘검고 빨간 가방’을 들고
그 어르신 집 앞까지 직접 배달을 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가방 색깔도 현금 여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식일까.
아니면 매일 같은 시간에 움직이는 규정이 상식일까.

이쯤 되면, 그대들이 정상인지
내가 비정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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