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위의 초혼(招魂)

1971년 동국민학교 6.25 행사

by 고영주



전주천을 건너온 눅눅한 바람이 교정의 미루나무 잎새를 무겁게 흔들고 있었다. 공기 속에는 비에 젖은 흙먼지 냄새와, 학교 뒤편 민가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탄불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밤새 습기를 머금은 모래알들이 왕자 표 운동화 바닥에 쩍쩍 달라붙었다. 평소라면 아이들의 함성으로 들끓었을 테지만, 그날 아침의 공기는 묘한 느낌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애국조례(愛國朝禮)를 위해 운동장에 모여선 전교생의 머리 위로, 유월의 햇살은 잔인하리만치 무심하게 쏟아져 내렸다. 단상 높이 올라선 교장 선생님의 훈화(訓話) 말씀은 마이크의 잡음 속에 섞여 내 귀에는 그저 웅웅 거리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에 담긴 비장함과 운동장을 감도는 기묘한 정적은, 지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했다.


훈화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들어오는 복도에는 며칠 전부터 학생들이 그려낸 반공(反共) 포스터들이 보였다. 도화지 위에는 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듯한 거대한 괴물이 하얀 한반도를 삼키려는 형상이 거칠게 그려져 있었다. 괴물의 눈은 번뜩였고 날카로운 이빨은 금방이라도 무엇인가를 물어뜯을 듯 기괴(奇怪)했다. 포스터 아래에는 ‘무찌르자 공산당’, ‘이룩하자 조국 통일’과 같은 붉고 검은 글씨들이 비명처럼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포스터를 바라보며 막연한 공포와 함께, 어쩌면 저 괴물이 정말로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전율(戰慄) 섞인 상상을 했다.


원고지 위의 초혼(招魂) — 1971년의 기억


​창밖은 초여름의 녹음이 짙어가는 평화로운 오후였으나, 교실 안을 지배하는 기류는 사뭇 비장했다. 교탁 앞에 선 선생님의 안색은 여느 때의 훈육과는 다른, 경건함과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선생님은 천천히 입을 열어 강원도 계방산 기슭, 눈 덮인 초가집에서 벌어진 그 참혹한 밤의 서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음성은 때로 산골의 칼바람처럼 날카롭게 교실의 정적을 갈랐고, 때로는 억울하게 사그라든 어린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잦아들며 아이들의 여린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이를 던져 넣었다. 선생의 묘사가 무장공비의 대검과 어린 승복의 찢어진 입가에 머물 때면,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공포와 분노가 기묘하게 뒤섞인 빛이 서렸다.


​“자, 이제 저 서릿발 같은 외침을 너희가 이어받을 시간이다.”


​선생의 손에 들린 누런 원고지 뭉치는 마치 전장으로 나가는 병사들에게 주어지는 격문(檄文)처럼 보였다. 분단 사이를 지나는 선생님의 발소리는 무거웠고, 아이들의 책상 위에 낙엽처럼 내려앉는 원고지들은 곧 누군가의 눈물과 누군가의 서툰 결의로 채워질 제단이었다.


​아이들은 침을 삼키며 연필을 쥐었다. 낡은 참나무 책상에서 올라오는 냄새와 코끝을 간지럽히는 분필 가루 속에서, 아이들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전쟁과 이념이라는 괴물을 원고지 칸칸에 가두기 위해 서투른 문장들을 하나둘 새겨 넣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칠판에 ‘6·25의 비극과 나의 각오’라고 적었다. 나는 연필을 쥔 채 도무지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하얗게 질린 원고지만을 바라보았다. 전쟁이 가져다준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意志)는 여덟 살 소년이 담아내기에 너무나 거창하고 육중한 주제였다. 나는 그저 어렴풋이 들었던 전쟁 이야기들과 포스터 속 괴물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뚤삐뚤한 글씨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침묵이 흐르는 교실 안, 사락사락 연필 굴러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몽당연필을 꼭 쥔 채, 듬성듬성 빠진 앞니 사이로 혀를 살짝 내밀고 원고지 칸칸마다 정성을 꾹꾹 눌러 담았다.


​'무서운 공산당 괴물이 오지 못하게 씩씩한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겨우 적어 내려간 몇 문장은 거창한 구호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나, 그것은 내가 세상을 향해 내보이는 가장 정직한 다짐이었다. 창밖 유월의 햇살은 눈부시게 평화로웠고 포스터 속 붉은 괴물은 금방이라도 종이를 뚫고 나올 듯 매서운 눈초리를 부라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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