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리아의 6.25 웅변대회

by 고영주


웅변대회

​강당 안의 공기는 수백 명의 아이들이 내뱉는 뜨거운 숨결과 먼지가 뒤섞여 후덥지근하게 달아올랐다. 단상 위에는 ‘제21주년 6.25 상기 웅변대회’라는 글씨가 적힌 큼지막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앞줄에 늘어앉은 아이들은 평소처럼 장난을 치다가도, 가끔씩 들려오는 마이크의 날카로운 하울링 소리에 어깨를 움츠리며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선생님들은 양복 깃을 매만지거나,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시계와 순서지를 번갈아 살폈다.

교장 선생님이 단상 중앙에 서서 안경을 고쳐 쓰자, 강당 안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교장 선생님은 엄숙한 표정으로 청중을 한 차례 휘어잡듯 둘러본 뒤, 마이크를 향해 낮고 묵직한 음성을 뱉어냈다.

​"친애하는 전주 동국민학교 어린이 여러분, 오늘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비극, 6.25 전쟁이 발발한 지 스물한 해가 되는 날입니다. 저 기린봉의 해가 아침마다 떠오르고 전주천의 물줄기가 흐름을 멈추지 않듯, 우리 가슴속의 반공의 혈투 또한 결코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는 웅변 원고를 쥔 아이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훈화를 이어갔다.

​"오늘 이 자리에 선 저 어린 연사들의 외침은 단순한 목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너진 국토를 재건하고, 붉은 무리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우리 민족의 결연한 의지입니다. 여러분의 사자후가 저 하늘 끝까지 닿아,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평화와 통일의 초석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짧은 훈화가 끝나자, 절제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수의 잔향이 채 가시기도 전, 사회자 선생님의 호명에 따라 첫 번째 연사가 단상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 속에 담긴 '재건'과 '사자후'라는 단어의 무게를 가늠해 보며, 차례를 기다리는 세실리아 누나의 누나의 옆모습을 떨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누나는 며칠 전부터 이냐시오 형이 다듬고 또 다듬어 써준 원고를 손에 꼭 쥔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고에는 형의 고뇌가 문장마다 서려 있었다.

평소 조용히 독서를 하거나 도화지에 만화 주인공을 그리기를 즐기던 수줍은 세실리아 누나가, 웅변대회에 나선 것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배경에는 엄마와 삼촌의 독려와 얼마 전 백일장 대회에서 상장을 받아온 헬레나를 향한 묘한 시샘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생의 성취를 축하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던 누나에게, 이번 대회는 언니로서의 자존심을 세울 기회였던 셈이다.

"대회에 나가면 용돈을 주마"라는 어머니의 달콤한 유혹은 누나가 생경한 무대에 몸을 던진 결정적 동기가 되었다. 누나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긴장된 기색으로, 형의 필력이 담긴 원고를 다시 한번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세실리아 누나는 상기된 얼굴로 원고를 훑으며 입안으로 소리 없는 외침을 반복했다. 누나는 대회를 앞둔 일주일 동안 기자촌 꼭대기 공터에 올라, 전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허공을 향해 이냐시오 형이 써준 원고를 목놓아 외치고 또 외치며 연습을 거듭했다. 이냐시오 형이 짚어준 강조점과 억양을 되새기는 누나의 얼굴에는, 생경한 무대에 대한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관중석 한편에서 그런 누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형의 필력이 누나의 목소리를 빌려 어떻게 강당을 뒤흔들지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곧이어 마이크의 날카로운 하울링이 정적을 깨뜨렸고, 누나의 이름이 호명되자 나는 마치 내가 단상에 오르는 듯한 전율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세실리아의 무대


​"다음 연사는, 5학년 2반 고세실리아! 연제(演題)는, '반공(反共)의 길, 국토 완수의 길'!"

​그 준엄(嚴)한 호출에 응답하듯 세실리아 누나가 단상에 올랐다. 평소 수줍음 많고 감성적이며 낡은 만화책의 세계에 침잠(沈潛)하기를 즐기던, 식구들조차 큰 목소리 한번 듣기 힘들었던 누이의 등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변(異變)이었다.

​"... 선열(先烈)들이 흘린 뜨거운 피로 지켜낸 이 강토 위에, 다시는 시련의 어둠이 드리우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단결된 힘과 꺾이지 않는 투지(鬪志)로 시대를 가로막는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줄 이 땅 위에 정의와 번영이 길이 빛나게 해야 합니다. 자유의 방패로 공산 침략의 마수(魔手)를 꺾고, 이 땅에 영원한 민주의 횃불을 밝히자고 이 연사 목놓아 외칩니다!"

​누이는 원고의 결구(結句)에 다다를 때마다 조막만 한 주먹을 불끈 쥐어 허공을 향해 세차게 내지르며 결연(決然)한 기개를 토해냈다. 가녀린 소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비장한 목청은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의 고막을 때렸고, 숨죽이며 듣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웅변대회의 격정적인 사자후가 잦아들고 강당 안은 팽팽했던 긴장이 일시에 풀리며 기묘한 정적과 소란이 뒤섞였다.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선생님들은 채점표가 놓인 서류판을 옆구리에 끼고는 강당 한쪽 구석으로 모여 머리를 맞댔다.

낮게 깔리는 속삭임과 신중하게 오가는 눈빛은, 방금 전 단상 위에서 목을 놓아 외쳤던 연사들의 희비(喜悲)를 가를 것이었다. 어떤 선생님은 안경을 치켜 쓰며 특정 연사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고, 또 다른 선생님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담배 연기처럼 깊은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아이들의 치기 어린 외침 뒤에 숨은 문장의 깊이와 발림의 기교를 저울질하는 그들의 엄숙한 표정은, 마치 전장의 논공행상을 결정하는 장수들로 보였다. 나는 그 은밀한 회합의 풍경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누나의 이름이 적힌 칸에 매겨질 점수의 무게를 가늠해 보느라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막간의 시간을 메운 것은 우리들의 합창이었다. 음악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춰 전교생이 일제히 ‘6.25의 노래’를 제창하기 시작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로 시작되는 비장한 가사가 강당 천장을 때리고 밖으로 흘러넘쳤다. 하지만 아이들은 목청껏 소리를 지르면서도, 옆 친구와 눈등을 치며 낄낄거리거나 주머니 속의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세실리아 누나의 초조한 뒷모습 위로,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가늘게 부서졌다. 나는 웅변대회의 거창한 구호보다도 누나의 주머니에 들어올 어머니의 용돈이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적을 깨고 마이크 앞에 선 사회자 선생님의 목소리가 강당 안을 날카롭게 갈랐다.

"마지막으로 대상을 발표하겠습니다. 대상은..."

선생님은 약간 뜸을 들였다.

"5학년 2반 고세실리아!"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누나는 마치 발밑의 지면이 꺼지기라도 한 듯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앞만 응시하던 누나는 옆에 앉은 학생들이 축하의 박수와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실감이 났는지 어깨가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단상으로 올라가는 누나의 걸음걸이는 아까의 당당한 연사의 모습과는 달리 수줍고 조심스러웠다. ,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커다란 상장과 상품을 건네받는 순간 누나의 상기된 얼굴은 유월의 햇살보다 더 환했다.

​상장을 가슴에 꼭 껴안고 내려오는 세실리아 누나의 눈가에는 맺혀있던 긴장이 눈물이 되어 그렁거렸다. 이냐시오 형이 밤새 써준 원고의 무게를 이겨냈다는 안도감과, 이제는 당당히 헬레나의 상장 옆에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올릴 수 있다는 뿌듯함이 얼굴에 교차했다.

​그날 저녁, 소식을 전해 들은 가족들의 반응은 축제 분위기였다. 이냐시오 형은 자신의 문장이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는 사실에 짐짓 덤덤한 척하면서도, 입가에는 자랑이 묻어있었다. 어머니는 "우리 딸이 장하다"며 대견해하시며 누나의 손에 빳빳한 오백원 지폐 한 장을 쥐어주셨다.

누나의 손에 쥐어진 빳빳한 오백 원권 지폐를 보자, 내 머릿속엔 며칠 전 드나들던 만화방의 풍경이 명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백 원은 수십 권의 만화책과 연탄불 위에서 매콤 달콤하게 자글거리는 떡볶이를 몇 번이고 누릴 수 있는 마법의 통행권이었다.

낡은 만화방의 눅눅한 종이 냄새와 비밀스러운 공기와 그 빳빳한 전리품이 열어줄 달콤함에 내 입가에는 어느새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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