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의 엄마가 된 세실리아의 장미 키우기
우리는 흔히 아이를 '아직 모르는 존재'라고 규정하며 삶의 맥락에서 소외시키곤 한다.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는 아이에게 사막보다 더한 고립이다. 폭력의 단면을 통해, 세월이 흘러 엄마가 된 세실리아가 언어로 쌓아 올린 치유의 울타리를 들여다본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입에 고기 한 점을 강제로 쑤셔 넣는 장면은 일상적이고 가족적인 풍경으로 묘사되지만, 그 이면에는 한 인간의 실존을 근원적으로 박탈하고 있다. "너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선언, 즉 자녀를 주체가 아닌 교정의 대상으로 대하는 행위인 것이다.
역시 아름다운 동화로 기억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도, 그 이면에 흐르는 '고독과 유배의 서사'에 나는 주목한다.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정서적 방임'이라는 폭력이 감춰져 있다. 어린 왕자가 만난 어른들은 숫자의 성(城)에 갇혀 아이의 본질적인 질문을 외면한다. 그들에게 아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나 소유욕을 투사할 익명의 존재일 뿐이다.
지구의 장미 정원에서 오천 송이의 꽃을 보며 절망하던 어린 왕자의 슬픔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것은 '개별적 유일함'을 거세당한 자의 비애이다. 타인을 고유한 영혼으로 대하지 않고 '관리 대상'이나 '수많은 아이 중 하나'로 범주화하는 순간, 우리는 그를 영원한 이방인의 땅으로 유배 보내는 가해자가 된다.
나는 며칠 전 세실리아 누나와 나눈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누나는 나와 유년의 기억을 공유한 동지이자, 내 글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믿어주는 몇 안 되는 열독자 중 한 명이다. 그런 누나가 자녀를 대하는 자세는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세 아이의 어머니인 누나는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일어나거나 부모로서 결정을 내릴 때, 심지어 부부싸움을 하기 전에도 아주 어린 자녀들을 앞에 앉혀두고 그 연유를 상세히 설명한다. 아빠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엄마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심지어는 오늘 밤 왜 부부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지까지 말이다.
세실리아는 고백한다. 본인의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가해진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방적인 일들'이 얼마나 깊은 상흔이었는지. 설명되지 않는 분노, 맥락 없는 강요, 그리고 아이의 시선을 소외시킨 채 자행되던 어른들의 '세계'는 어린 세실리아를 정서적 진공 상태로 밀어 넣었다. 그것은 한강이 그린 ‘강요된 허기’보다 처절했으며, 어린 왕자가 마주한 ‘무관심의 사막’보다 가혹했다.
누나의 '설명'은 바로 그 유배지에서 돌아오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다.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은 아이를 사건의 관찰자가 아닌 삶의 주체로 대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부모의 행동 뒤에 숨은 서사를 공유함으로써, 아이가 세상을 예측 불가능한 공포의 공간이 아닌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안전한 대지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폭력에 의해 자아가 파쇄되고, 어린 왕자가 끝내 육신을 벗어던져 별로 돌아가려 했던 것은 그들을 온전한 시선으로 바라봐 줄 '단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나는 그 비극의 연쇄를 끊어내기 위해, 과거 자신이 그토록 갈구했던 '단 한 사람'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세실리아는 자녀들에게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라는 여우의 말처럼, 누나는 납득 가능한 '설명'이라는 행위를 통해 아이들과 서로의 세계를 밀도 있게 길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긍정하며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고독한 유배자들은 망명지의 적막을 깨고 돌아와 그 누군가의 '유일한 장미'로 피어난다. 세실리아가 어린 자녀들에게 건넸던 설명이라는 행위는, 폭력의 시대를 경험한 자의 고백이자 자애로운 응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