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티재를 넘어서자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곰티재를 넘어서자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망덕(望德)의 시간은 서울 구로동의 거칠고 조급한 호흡과 결이 달랐다. 번잡한 경적 소리를 내지르는 버스도, 폐부를 찌르는 매캐한 공기도 없었다. 오직 산천의 깊은 적막만이 마을의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속절없이 떠난 어머니의 빈자리는 선명하게 도드라졌고 산간에 홀로 남겨진 어린 가슴에 사방을 에워싼 산들의 서늘한 위압감과 가슴을 누르는 막막함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고독과 막막함을 견디기 위해 마당의 어둑한 헛간이며, 날카로운 가시가 돋은 탱자나무 주위와, 세월의 더께가 앉은 뒷마당의 이끼 낀 바위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것은 놀이라기보다, 나를 이곳에 묶어둔 운명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몸짓이었다.
한약방의 약재 냄새가 노을 되어 마당에 내려앉을 무렵, 나는 비로소 내가 돌아갈 곳 없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언젠가 할아버지 댁에 놀러 온 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돌아갈 곳이 전제된 방문이었다. 이제 이곳의 가족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이 어린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당혹감으로 다가왔다.
어둠이 깔리자 할아버지는 호롱불의 심지를 조절하고 비사표 팔각 성냥을 그어 불을 밝혔다. 대청마루 위에는 정지에서 옮겨 온 할머니의 투박한 저녁상이 놓이고 솔잎 연기 은은히 배인 밥 그릇과, 구수한 된장찌개와 냇가의 기운을 머금은 고동국이 놓였다. 쌉싸름한 머위 무침과 새콤달콤한 도라지 반찬, 밥솥의 훈기로 익혀낸 노란 달걀찜의 부푼 질감이 유배지의 설움을 잠시 잊게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할아버지는 마당 가운데에 쑥과 마른 솔가지로 모깃불을 놓으셨다. 할머니와 누나들, 그리고 나는 덕석 위에 누워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하수 너머로 엄마 얼굴이 스쳐 지나고, 별이 된 파트라슈와 네로, 쌀집 셰퍼드의 섬뜩한 이빨과, 기자촌의 높디높은 계단 같은 기억의 조각들이 연기처럼 흘러갔다. 스물여덟 개의 별똥별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밤, 나는 뒷동산 모퉁이로 사라진 엄마를 찾아 별들을 하나둘 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