꽈배기의 질문

by 이유

퇴근길은 허기지다. 조금만 어물쩡거리면 지하철엔 사람이 너무나 너무나 많아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게 되기도 해서, 30분 거리가 1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찌그러진 채 열차를 타는 것도, 쏜살처럼 달려 여유로운 열차를 타는 것도 지나치게 치열하다. 출근 길도 마찬가지다. 나는 왜 배를 곯고 다니나. 길 위에서 배가 고프면 마음도 허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내리는 지하철역에는 찹쌀로 도넛을 만들어 파는 작은 가게가 있다. 마치 세월호 리본 같은 모양의 꽈배기부터 둥그런 팥 도넛, 유자맛이 나는 하얀 판 앙금이 들어있는 도넛, 핫도그까지 먹음직 스런 가게다. 표를 끊고 들어가야 있는데, 나는 종종 퇴근길, 그러니까 어딘가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르곤 한다.

꽈배기는 단돈 천백 원. 천 원이었다가 재료비 상승으로 백원이 올랐다. 막 튀겨서 보드랍게 부풀어 오른 노릇한 꽈배기는 참으로 먹음직스럽다. 주문을 하면 설탕에 묻혀드릴까요,라고 물어보는데, 당연하다. 나는 매번 설탕에 묻혀달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설탕 묻혀드릴까요.”

중년의 여성이 앞의 노신사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노신사는 대꾸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거나 주머니를 만지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곁에서 방금 전, 그가 꽈배기 5개를 주문하는 것을 보았다.

“설탕 묻혀드릴까요.”

마스크를 쓴 채로 하는 말이 잘 안 들리긴 하다.

여성은 다시 공손히 물었다. 설탕에 대해서.

이 노신사는 당뇨가 있는 걸까?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직원을 빤히 바라보며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설탕이요, 설탕 묻혀드릴까요?”

노신사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했다. 이치에 맞게 기다리는데 그것은 왜 주어지지 않고 설탕 그릇 앞에서 멈춰있는가.

나는 살짝 참견을 하고 말았다.

“설탕, 설탕 묻혀드릴까요?”

나는 조심스레 그의 잿빛 양복 재킷 소매를 잡고, 여성의 말을 반복했다. 당장 내가 꽈배기를 설탕에 묻혀드릴 것처럼. 나는 그의 바로 옆, 2센티미터 옆에 있었다.

나도 서너 번을 반복해서, 여성과 내가 계속 설탕을 물었다. 노신사가 드디어 우리가 그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잘 안 들려서. 뭐라고 했는가?”

여성은 이미 진이 빠졌다.

“아이고, 나는 지금 말할 힘이 없네. 말 좀 해줘요.”

“설탕이요. 꽈배기에 설탕을 묻혀서 드릴지 여쭤봤어요.”

나는 그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두 사람이 계속 크게 말했는데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 같다. 그가 당연히 들었는데도 어떤 이유에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을 한 나의 성급함과 편협함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안 들리셨을 수도, 귀가 안 좋으실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 못한 것이다. 무지한 나의 판단이 그에게도 전해졌던 것 같다. 노신사는 당황해서 지갑을 꺼내며 계산을 서둘렀다. 어서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듯이. 지금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나와 중년 여성이 그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입모양이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허름하지만 몸에 잘 맞는 양복에 중절모까지 갖춰 입은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으나 당당히 비닐봉지에 담긴 꽈배기 5개를 비로소 손에 넣었다. 브라보.


바스락, 꽈배기가 떠났다.

그가 꽈배기에 설탕을 묻혔던가, 아니었던가. 어떻게 대답했던가.

나는 그렇게 묻고도 노신사의 대답을 기억하지 못한다.


“뭐 드릴까요?”

“꽈배기 하나랑, 팥 도넛 하나요.”

내게도 질문이 돌아왔다.

“설탕 묻혀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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