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으로 출퇴근하던 때가 있었다. 매일 아침 9시까지 도착해서 정각 6시에 도서관 문을 나섰다. 도서관이 직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구직이 무척이나 되지 않던 때였다. 어느 주말, 창문 틈으로 좋은 햇살이 들어왔고,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남산도서관’이라는 안내방송에 내렸고, 어문학 실에서 닉 혼비의 신간 소설을 읽었다. 그렇게 시작됐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도서관에 가서 보고 싶은 책을 골랐다. 그리곤 자리를 잡고 앉아 다 읽고서 집에 왔다.
책은 말해주고 있었다. 등장인물의 문제와 고통, 마음속 이야기 들을. 특히 소설이 그랬다. 그 속에는 문제 투성이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용감하게도 그 문제들과 두려움을 내게 열어보였다. 나는 그들이 용감하다고, 나에게 친밀하게 열어 보인다고 느꼈다. 허구지만, 진솔하다고 느꼈다. 도서관 안에서 나는 오랜만에 포근함을 느꼈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을 했다던데, 나는 이야기로 지어진 주택가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나의 글을 쓸 수 있다면, 나의 집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글을 쓰고 싶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는 내 이야기를 어디까지 어느 정도 해야 하는가였다. 에세이도, 소설도 그랬다. 글에 적힌 것이 모두 사실일 필요는 없지만 진실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내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쓸수록 내가 드러났다.
어떤 글은 쓰고 나면 나의 한 부분을 떼어낸 것 같다. 작은 조각이지만 전부 같아서, 내가 다 들통이 날까 봐 겁이 나기도 한다. 그 글을 밖으로 내보내기까지 내 마음은 가구가 없는 빈 방 같다. 말소리가 울린다. 어색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쓰고 또 쓰면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반성하고 숙성시킨다. 누가 내 이야기에 관심이나 있을까 싶지만, 이것이 읽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 소망한다.
스윙을 함께 추는 친구들에게 마작을 배웠다. 우리는 스윙 강습 전이나 후에 친구의 집에서 모여 게임을 했다. 나는 게임의 규칙에는 서툴다. 초보자로서 이해한 마작의 목적은, 용을 만드는 것이다. 머리 하나, 몸통 네 개를 만들면 되는데, 점수가 나는 상황들이 꽤 복잡하다. (그래서 매뉴얼을 옆에 놓고서 게임을 한다.)
마작의 규칙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낸 패를 내가 갖고 싶을 때 상황에 따라 퐁, 혹은 치라고 외치면서 가져오는 것이다. 이때 소리 내어 외치는 것을 ‘운다’라고 한다. 울었다면 가져온 패가 포함된 몸통 하나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펼쳐놓아야 한다. 그렇게 한 부분을 열어놓고 게임을 한다.
나는 잘 운다. 운다는 말도 좋고, 퐁! 치!라고 외칠 때의 긴장감도 재밌다. 하지만 아직 게임의 규칙에 서툴러서 울고 난 후 몸통 하나를 펼치면 그게 아닌 경우가 많았다. (마작은 어렵다.) 어느 날 친구가, 이번에도 잘 못 펼쳐 보인 나에게 웃으며
“네, 잘 읽었습니다.”
라고 했다.
내가 펼쳐진 책이라고 상상해보았다. 한 장, 한 장, 펼쳐진다. 나는 어떤 책일까? 어쩔 수 없이 드러난 나라는 책을 상상해 본다. 내가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책이 나에게 정말 좋은 친구가 돼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손에 들린, 펼쳐진 책이라면, 읽으면서 외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친구가 되면 좋겠다고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