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당 없는 대전 방문기 2. 출발
허리디스크 환자 회복기의 1박 2일 SST(슬로 스몰 트립)
-서울역에서 9시 8분 출발이야. 출근하는 것처럼 나오면 돼.
미리 기차표를 예매한 R이 말했다.
우리는 공휴일 앞의 평일을 하루 연차 냈다. 남들 출근할 시간에 우리는 놀러 가는 거다.
나는 놀 때 더 착실하고 부지런하다. 출근할 때는 아침에 눈꺼풀이 천근만근인데, 휴일에는 눈이 알람을 맞춘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떠진다. 역시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인 걸까.
서울역에 도착하니 R이 반겼다. R이 웃으면, 눈과 입이 시원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얼굴 전체가 동그라미가 된다. 그리곤 마치 전등을 탁, 켠 것처럼 환해진다. 불이 탁 켜진 동그란 전구.
R은 참 성실하다. 진즉 나와서 날 기다리고 있다. 나처럼 놀 때만 성실한 것이 아니라 디폴트가 그렇다. 지금까지 본 바로는 그렇다. 어쩌면 그런 성격 때문에 아픈 중에도 우리가 지금까지 잘 지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 R은 오래 사귄 연인처럼 믿음직스럽게 난관을 견뎌냈다. 이렇게 침착하고 다정하고 성숙한 사람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불안했다. 마음이 한창 깊어지고 있을 때 걷기가 힘들 정도로 허리가 아프다니. 내입장에서는 헤어지자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사랑을 해서 연인이 되고 그렇게 연애를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서 연애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둘 다일 수도 있지만, R에게 사랑보다 행복이 더 중요하면 어쩌지. 이렇게 같이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매일 아프다는 소리를 하고, 그런 소리를 하다가 울고. 일상을 안정되고 소소하게 유지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R에게, 지금의 상황은 불행에 가까울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를 R에게 차분히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 때면 방어적이 되어 R을 못살게 굴기도 했다. 날 떠날까 봐, 떠나지 말아 달라고 더 심술을 부렸던 것이다. 이래도 안 떠날 거야? 이래도? 그건 도대체 무슨 심리였을까. 어느 날 R이 폭발했다.
-정도껏 해. 나도 허리디스크로 아파봤어. 그걸로 안 죽어.
R은 상황을 냉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나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중이었다. 서로에게 찾아온 사랑을 지키는 것이 그에게도 중요했다. 그래서 최대한의 갈등이 없도록 나를 세심하게 살피면서 맞춰준 거였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으니. 힘든 건 힘든 거였다. 그날 한바탕 날 선 말들을 쏟아내고 나도 울고 불고. 그 요란이 지나고 작고 고요한 마음 하나가 남았다. 깨달음 비슷한 거라고나 할까. 아, R을 알아가려는 노력이 부족했구나.
뜻하지 않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사랑과 관심이 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거저 주어졌을 뿐.
그리고 불청객 같은 사고나 병마도 있다. 그 또한 불청객을 맞은 이의 잘못이 아니다. 무엇을 잘못해서 아픈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도 밝고 따뜻하고 맛있고 매끄러운 것만 인생으로 인정하는 것 아닐까? 그러지 않을 때는 무언가 잘 못 되었다고 느끼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진 것 아닐까?
대전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했다. 나란히 앉은 R이 바스락 거리는 봉지 하나를 꺼냈다.
-자기야, 사랑해.
R은 쑥스러워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말을 참 잘한다. 덕분에 나도 그렇게 되었다.
-나도 자기야 사랑해.
봉지 속에는 생율이 들어있었다. 5시 반에 일어나서 이걸 다 깎았다고 한다. 울퉁불퉁 뽀얀 생율이 잔뜩 있었다. R이 말했다.
-나한테는 이게 사랑이야.
응? 그렇구나. 생율이 사랑인 이유는 잠시 후에 듣기로 한다.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아사삭. 생밤에 과육이라는 것이 있구나, 처음 느꼈다. 시원하고 맑고 수줍게 달콤한 맛이 입맞춤처럼 입안에 머물렀다.
- 자기랑 여행을 다 가보네. 집 앞에 동네 편의점도 가기 힘들었는데.
R이 잘생긴 손(R은 손이 정말 잘 생겼다.)으로 내 손을 지그시 잡았다. 나는 동그랗게 불이 켜진 전등의 입을 찾아 생율을 하나 넣어주었다.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