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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당 없는 대전 방문기 1.(인트로)

허리디스크 환자 회복기의 1박 2일 SST( 슬로 스몰 트립)

by 이유

어쩌면 시작은 성심당이었다. R이 내 생일 케이크를 성심당에서 공수해오겠다고 한 것이다.

대전에 있는 성심당? 휴일이 황금보다 귀한 직장인이 케이크를 사러 서울에서 대전까지 왔다 갔다 하겠다고? 하루가 다 끝나고 말 텐데? 하하하, 웃으며 말렸다. 나를 위해서 그 멀리까지 다녀올 생각을 하다니. 방문한 적도, 연고도 없는 대전은 그렇게 잠깐 사랑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잊혔다.


R과 나는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만났다. 불과 1년 전까지 나는 걷는 시간보다 춤추는 시간이 많았다. 과장이 아니다. 그때의 시간을 편평한 바닥에 주욱 늘어놓고 비교한다면 춤추는 시간이 걷는 시간보다 두 배는 길었을 것이다. 춤추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 토요일 밤, R이 댄스홀을 가로질러 내게로 왔다. 손을 마주 잡으니 처음 듣는 난해한 곡이 나왔다. 함께 삐그덕 삐그덕 어색한 춤을 추었지만 내심 기뻤다. 이 웃는 모습이 귀여운 남자가 노래를 가늠할 겨를 없이 나와 춤추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 달려왔다는 거니까.


그랬는데, 그렇게 알콩달콩 같이 춤추고 연애를 시작했는데, 한 달이 되지 않아 허리 디스크가 터져버렸다. 십 대 때부터 나의 허리는 늘 나빴다가 나아졌다 했다. 여태껏 허리통증은 누적된 스트레스나 기분의 고저에 따라 몸이 잠시 협박성 파업을 선언하는 정도였다. 그날은 달랐다. 그래, 금요일이었지. R과 스윙댄스 강습을 듣고 돌아가던 밤이었다. 오른쪽 다리며 엉덩이가 견딜 수 없이 아팠다. 걸어 다니는 시간보다 춤추는 시간이 더 길었는데 이제는 누워있는 시간이 주욱 길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을 하자고 했지만 생명에 긴박한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여건도 어려워 신경주사를 맞고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통증은 하루종일 파도쳤다. 잔잔하게 때론 강렬하게. 나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구명 튜브를 꼭 쥔 채 파도를 견뎠다.


R은 무슨 죄인가. 연애한 지 한 달 만에 나의 양말을 신겨주고, 짐을 들어주고, 움직일 때마다 꼿꼿한 지팡이가 되어주었다. 통증의 파도가 갑자기 높아지면 덩달아 예민해지는 나의 성질도 묵묵히 받아주었다. 신경질을 내다가 바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과를 했다.

"미안해. 너무 아파. 계속 이렇게 아프면 어떡하지."

그럴 때면 R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아집니다. 반드시. 자기랑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나아서 같이 하자 우리."


그로부터 6개월 정도 지났을까 나는 이제 통증으로 잠을 깨지도 않았고, 한 시간 이상도 큰 무리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집, 회사 활동 반경을 넘어서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기차도 타볼까. R과 여행이 가고 싶었다. 달캉달캉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의 리듬을 함께 느끼면서 창밖을 보고, 간식도 먹으면서 처음 가보는 곳의 설렘을 느끼고 싶었다. 함께 새로운 길을 걷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잘 자고 상쾌하게 아침을 맞고 싶었다. 걱정 없이 가고 싶은 길을 걷고 싶었다. 조마조마한 마음 없이. 주욱.


잠이 오지 않는 밤, 누워서 핸드폰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잔잔한 수평선 그림을 발견했다. 여명인지 황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둠과 빛이 네모난 세상 속에, 서로에게 스며있었다. 레이코 이케무라: 수평선 위의 빛.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고 했다. 대전이었다. 대전? R이 케이크를 사러 가고 싶어 했던 그곳이란 말이지? 전시회 링크를 R에게 공유했다.


-R, 자니? 우리, 대전 여행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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