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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이상한

by 이유

이제 막 새해가 된 타이페이는 비가 자주 내리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에 들어서는데, 문 앞에 걸려있는 작은 나무판이 눈에 띄었다. ‘Be brave’라고 쓰여있었다. 용기를 내라니? 문을 드나들 때면 비스듬히 시선을 피했다. 마치 그 글자와 눈이라도 마주칠 것처럼.


여행 중에 영화관 SPOT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아멜리에‘와 ‘비밀의 화원‘이 가볍게 섞인 느낌의 영국영화였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아기 때 홀로 숲속에 버려진 벨라는 다 자란 어른이지만 아직도 겁이 많다. 늘 혼자다. 친구도, 눈을 마주치는 사람도 없다. 트라우마로 인해 나무와 풀도 두려워해서 뒷마당을 정글이 되도록 방치한다. 그러다가 정글이 된 뒷마당을 잘 가꾸지 않으면 집에서 내쫓길 위기에 처한다. 그렇게 그녀의 작고 단단한 세계가 깨진다. 모험이 시작된다. 집 밖으로 나와 정원도 가꾸고(정글은 정원이 되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친구도 사귀게 된다. 이웃과 함께 식사도 하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사랑도 하게 된다.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으로부터 용기 있게 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화의 제목은 This beautiful fantastic 이었다.

타이페이 현대 미술관에서 전시도 하나 보았다. 타이페이 현대 미술관은 타이페이에 갈 때면 꼭 방문하는 곳 중 하나다. 대만 중견 작가의 개인전이 크게 열리고 있었다. 늙어감과 망각, 상실, 죽음, 그리고 그에 용감하게 맞서는 것에 대한 고민이 담긴 작품들이었다.

작품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작은 전시관 하나를 통째로 쓴 것이었는데, 칠흙 같이 어두워서 바깥 입구에서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음침하고 스산한 기계음과 짐승이나 악마(!)의 소리가 났다. 그 작품을 보려면 그냥 들어가야 했다. 어떤 내용이라는 작품설명도 없었다. 무서웠다. 종종 한적한 미술관에서 혼자 전시를 관람할 때 무서울 때가 있는데, 이토록 두려운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에 나의 호기심은 팔팔했다. 앞에서 절절매다가 입구에 앉아있는 미술관 직원 분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한데 저랑 같이 들어가 주실 수 있나요? 너무 무서워서요.”

직원 분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날 가만히 보시더니, 긴 말도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와중에 어린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가 손을 잡고 입구를 통화하고 있었다. 이때다! 스윽 같이 들어갔다. 어린 아이의 뒤에 숨어서.

옆에 누가 있든 말든, 빛이라곤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들어가자마자 혼자가 되었다. 악, 너무 무서웠다. 게다가 그 안은 꼬불꼬불 미로였다. 어둠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길이 막혔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듣기 힘든 소리가 어둠과 함께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서 나가고 싶었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디디는데 또 막다른 길이었다. 그런데 번쩍, 마주한 벽에 불이 들어왔다. 악, 너무 무서워서 괴물이구나! 했는데, 내가 만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가 겁에 질려있었다.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제 무서움은 희미해졌다. 전시의 제목은 ’Brave the world' 였다.


타이페이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는데 다시 문 앞의 ‘Be brave’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도망치듯 떠난 서울로 돌아가려니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참이었다. 서울엔 두려워서 피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특히 한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사랑이었다. 하지만 다른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다.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려고 타이페이에 왔는데 용기를 내라는 메시지만 잔뜩 받았다. 그 말을 마음에 담고 숙소를 나섰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가방 깊숙이 넣은 우산을 꺼내자니 귀찮아, 그냥 비를 맞기로 했다. 일주일의 여행이었지만 짐이 많았다. 우산까지 펼쳐 들 여력이 없었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다. 이렇게 그냥 비를 맞아 본 적이 있었던가. 겉옷은 빗방울에 점점 젖어들고 있었다. 그럴수록 나도 대담해졌다. 빗속을 걸으니 해방감마저 들었다. 이제 신호등 앞이다. 신호가 바뀌어 저 큰 길을 건너서 몇 백 미터를 더 가면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때였다. 어느 젊은 여자 분이 내 어깨를 탁하고 치면서 뭐라고 하는 거였다. 크지도 않은 우산을 내게 씌워주면서. 나는 놀라서 그 분을 바라보았다. 분명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다니냐는 뜻 같았다. 마치 친언니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매섭게 어깨까지 때려가며 말이다. 나는 어색한 영어로 지금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나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우산을 거절했지만, 그 여자 분은 막무가내로 내 배낭을 움켜쥐고 우산을 씌워줬다. 아는 사람도 그렇게 까진 안 할 행동이었다. 그 분은 계속 중국어로 말했다. 아마도 날 혼내는 것 같았다. 그 참견과 적극적인 걱정에 내 마음은 뭉클해졌다. 우리는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했고, 그 분은 날 공항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같이 걷는 길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좋았다. 같이 있은 지 몇 분되지 않았는데, 헤어지기 아쉬웠다. 목적지에 다다르고 말았다. 나는 멈춰 서서 그 분을 바라보았다. 작고 마른 몸이었고, 꾸밈이 없는 수수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눈치를 챘는데, 눈이 불편한 분이었다. 두 눈의 눈동자가 모두 노랗고 푸른, 초점을 읽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용기를 내서 와락 그 여자 분을 안았다. 내 마음이 전달이 될까 싶어 꼬옥 몇 초를 더 안았다. 그 여자 분은 내가 마치 전부터 알고지낸 사람이라도 되는 냥 담백하게 몇 마디를 하고는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가다가 뒤돌아보았더니 여전히 날 보고 있었다. 초점을 읽기 어려웠지만 분명 날 보고 있는 눈이었다.

나는 자주 내가 더 사랑하지 않을까, 그래서 더 상처받지 않을까 두려웠다.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이제 돌아간다. 돌아간다고 뭐가 많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분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용기를 내보자는. 내가 먼저 끌어안아 보자는 목소리였다.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을 끝내고 나오니, 커다란 두 팔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먼저 찾아가서 안아주려고 했는데 한 발 늦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안아주었다. 서울은 흰 눈이 내리는 한겨울이었지만 따뜻했다. 이건 사랑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 사람이 고마웠다.

이제 그 사람은 내 곁에 없고 한겨울은 매번 돌아온다. 겨울이면 그 날이 종종 생각난다. 두 도시에 따뜻한 비와 차가운 눈이 내렸던 그 날이. 그날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이 안아주었던 기억보다 처음 보는 여자 분을 내가 끌어안았던 기억이 더 선명한 것은 이상하고도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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