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정도 혼자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아빠에게 말씀드렸다.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혹여나 여자 혼자서 무슨 한 달이나 여행을 가냐고 혼내시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빠의 걱정은 다른 데에 있었다.
아빠는 내가 여행을 떠날 때까지 너 큰일이다, 그렇게 운동도 안 하고 체력이 딸려서 어떻게 여행을 하려고 그러니, 하셨다.
여행까지 몇 주 남지 않았을 때다. 아빠가 안 되겠다며 줄넘기를 챙겨주셨다. 하루에 100개씩 줄넘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아빠가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숫자를 세면서. 에이, 귀찮게, 라는 생각이 앞섰지만, 매일 저녁 뒷마당에서 줄넘기를 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초등학교 때는 쌩쌩이도 할 수 있었는데, 그냥 줄넘기를 백 개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이 무거워진다싶으면 아빠는
"소리가 작다!“
라고 참견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처음으로 단발머리에서 숏커트로 머리를 잘랐던 날 충격을 받고, 심지어 살짝 울먹였던 울보다.
"우리 딸이 이제는 하고 싶은 머리 스타일도 있고, 다 컸구나.“
그때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어린 시절 나는 사랑을 별로 못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문득문득, 아빠가 내 손톱을 깎아주셨던 일이 생각난다.
아빠는 대개,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손톱깎이를 찾았다. 아빠가 다가와서 그 도톰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아빠는 내 손을 요리조리 살피다가 또각또각 손톱부터 자르고, 손톱 뿌리를 덮은 살을 아빠 손톱으로 꾹꾹 밀어냈다. 나는 무심히 손을 주고 있다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곤 했다. 그래도 아빠는 묵묵히 큐티클을 밀어내린 후, 사포 같은 것으로 자른 손톱을 매끈하게 다듬어 주셨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건 사랑이었다. 내 곁에서 날 잡아주었던 사랑.
몇 년 전 봄, 아빠 엄마를 모시고 부산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아주 오랜만의 가족 여행이었다. 하지만 너무 늑장을 부렸나보다. 이제 아빠의 체력은 여행을 감당하지 못했다. 아빠를 부축하며 자주 손을 잡았다. 그 도톰한 손에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단단한 고단함이 배어있었다.
아빠는 해운대 초입 아스팔트 계단에 앉아서 더는 못 걷겠다고 했다. 100미터도 걷지 않은 후였다. 그 대신에 내게 바닷가로 다녀오라고, 맨발로 모래도 밟고 밀려오는 파도에 슬쩍슬쩍 젖어보라고 했다. 나는 아빠가 그렇게 걷기 힘들어하시는지 모르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아빠를 바라보며 손이나 흔들어댔다. 멀리서 바라 본 아빠는 작았고, 나 말고 어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촉촉한 봄냄새가 나는 2월의 타이페이였다. 중산 골목을 걷다가 줄넘기를 하고 있는 소녀를 봤다. 체육복을 입은 소녀가 폴짝폴짝 뛸 때마다 양 갈래로 높이 묶은 머리가 함께 뛰었다. 내일 체육시간에 줄넘기 테스트라도 있는지, 소녀는 열심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매번 열 개를 넘기지 못했다. 아빠가 이 아이를 봤으면 두 발바닥을 다 붙이려 말고 가볍게 뛰라고 했을 텐데. 구령을 붙여가면서.
아스팔트에서부터 경쾌한 소리가 찰싹찰싹 울려 퍼졌다. 아침부터 걸어 다닌 이 이모는 소녀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이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아이야, 이 이모가 살아보니까 역시 체력이 중요하단다. 건강이 최고야.
어디로 가면 좋을지 실컷 방황하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 구석구석을 오래오래 걸으려면,
그리고 어디 갔다가 다시 잘 돌아오려면 말이야.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눈이 커다랗고 말갛다. 나는 뭔가 애정이 솟아서 무슨 액션이라도 취하고 싶었지만, 어쩌다보니 죽어가는 터미네이터처럼 엄지를 척, 들고 말았다.
핫, 부끄럽다하고 후회하는 사이 아이는 씩 웃어주었다.
나는 안도하며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이미 종일 걸었다. 하지만 가고 싶은 곳이 아직 남았다. 더 걸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