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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일

by 이유


-안녕하세요, 저... 제가 처음이라서요...

-응? 처음이든 마지막이든 얼렁 누워.

-이렇게요?

-그래 그렇게, 어떻게 눕는지 몰라?

-아... 그게 아니라, 제가 처음 해봐서, 좀 쑥스러워서요.

-아니 뭐가 쑥스러워. 목욕 와서 때 미는 게 뭐가. 여행 왔어?

-네, 제가 오늘 생일이에요. 그래서 여행 왔어요.

-남자 친구랑 왔어?

-아니요. 혼자 왔어요.

-아니 왜 온양 온천에 생일이라고 혼자서 여행을 와?

-음, 요즘 피곤해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어요.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세신도 받고요.

세신사 분이 양손에 때수건을 장착하시고 내 몸을 벅벅 밀었다. 그렇게 다 벗고 낯선 이에게 몸을 맡기자니 기분이 묘했다.

-아가씨, 운동 해?

운동? 묘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헬스... 하는데요?

-근데 허벅지가 왜 이래?

허벅지? 아....... 운동선수 허벅지라는 말씀이신가 보다. 웃음이 터졌다. 내가 하도 웃으니까 세신사 분은 말투가 부드러워져서,

-이모가 하는 말 그냥 흘려 들어. 허벅지가 하도 건강해서 말해봤어. 허벅지가 튼실하네. 근데 왜 혼자 왔어? 남자 친구 없어?

-헤어진 지가 좀 됐어요.

-응, 생각날까 봐 거기 있기 싫었구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눈물이 나려고 했다. 울면 안 돼. 다 벗고 세신 받으면서 눈물이 귀 속으로 들어가는 거 생각만 해도 싫었다. 표정관리는 또 어떻고. 세신사 분이 나를 안다시피 하고 목과 어깨 때를 밀어주셨다. 세신사 분의 탄탄한 몸이 리듬감 있게 내 몸을 토닥이는 것 같았다.

-가만있어봐라, 언니! 언니 이리 와 봐.

세신사 분의 어떤 언니가 이리로 왔다.

-언니, 이 아가씨가 혼자 여행 왔대.

-응, 그래? 아니 여기를 젊은 사람이 혼자 왔어?

-아가씨, 몇 살이야?

세 살을 빼고 말했다.

-힉, 정말? 그렇게 안 보이는데.

기분이 좋았다.

-언니, 걔, 결혼했나? 호텔에 걔 언니랑 같은 동네 사는 남자애 있잖아.

-글쎄 나는 잘 모르지.

-아가씨 술 잘 먹어?

이야기가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일일 만남 좀 해볼래?

-저, 무서워요. 안 할래요.

이모가 웃었다.

-아니 왜 혼자서 여기를 와. 아, 이 아가씨 신경 쓰이네. 이 아가씨 때도 많이 나오고.

때가 많이 나오는 건 창피했지만 뭐, 생각해보면 사실 창피할 일도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신경 써준다는 사실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웠다. 이모가 등짝을 몇 번씩이나 때리며

-아이고, 때가 이렇게 많아

를 연발하셨다. 그렇다, 나는 때가 많은 사람이다. 여기다가 때를 다 벗고 돌아가야겠다. 나중에 또 때가 쌓일지언정 지금까지의 때는 벗고 가겠다.

이모가 내 몸에 따뜻한 물을 몇 바가지 끼얹었다. 몸이 뽀득뽀득 매끄러워졌다. 몸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했다.

-어 이상하다. 때만 밀었는데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아요.

-아이고, 얼마나 때가 많이 나왔는데 가벼워지지 않았으면 이상한 거지.

살면서 내 몸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구멍 난 양말로 나온 발가락도 싫었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이 불편해서 공중목욕탕도 못 갔는데. 세신을 받다니, 발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를 수건으로 올려 묶은 나체의 여인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세신사 이모는 꽃무늬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를 야무지게 입으시고 탄탄한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온천물이 좋긴 좋은가, 다들 미인이었다. 다양한 몸, 다양한 얼굴의 미인이었다.

이모는 또 와서 마사지도 받으라고 했다. 아로마 마사지도 받고 몸에 신경 좀 쓰라고. 열흘에 한 번 세신 받으면 좋다고.

나는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가뿐해진 몸으로 노천탕에 갔다. 공기는 찼고 하늘은 까맸다. 온천수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유, 추워

으드드드하면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이 따끈따끈했다. 몸이 노곤 노곤해졌다. 또 다른 이모들은 왼쪽 끝에 있는 작은 폭포 아래에 서서 물을 맞고 있었다. 그들은 센 물줄기에 맨몸을 가만히 대고 서 있었다. 쏴아 쏴아하고 요란한 물소리가 들렸다. 엄청나게 아플 것 같았다. 나는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두세 명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하늘은 까맸고, 공기는 청량했다. 노래가 나왔다. 노래는 그렇게 그냥 나오는 것이었다.

저기 이모들이 맞고 있는 폭포의 물줄기가 멈췄다. 알고 보니 사용자가 잠갔다가 켤 수 있는 것이었다. 일순간 조용해졌다. 나의 노랫소리가 번쩍하고 노출되었다. 당황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두세 개의 멜로디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빙긋이 웃으며 흐지부지 노래를 마무리 지었다.

목욕을 마무리하고 옷을 입기 전 몸무게를 재보았다. 세상에, 어제보다 1킬로그램이나 빠져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무궁화호 기차가 출발했다. 1킬로그램의 내가 점점 멀어져 갔다. 서울로 돌아간다. 좋은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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