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곳은 고층 아파트 하이팰리스 70층. 야경을 두고 의자에 마주보고 앉은 두 여성이 있었다. 한 명은 수수한 옷차림에 미러급 샤넬 명품백 짝퉁을 꼭 안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서윤. 맞은편에 앉은 화려한 인상을 한 여자의 이름은 백예주였다.
예주가 말했다.
“저는 제 사촌을 죽일 계획이예요. 제 미래를 위해서요. 당신이라도 저처럼 생각했을 걸요.”
“왜 그런 발상을 하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
예주는 씨익 비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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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무슨 생각을 하는가. 서울 신림동 원룸에 자취하는 서른살 이서윤, 그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벌어들일 급여를 떠올렸다.
오전 6시 28분, 알람보다 2분 먼저 깼다. 늘 그렇듯 수면 시간은 부족했고, 몸은 무거웠다. 하지만 애써 몸을 일으켰다. 서윤에게 지각은 실직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며, 실직은 곧 빚이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서윤은 거울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드라이기로 젖은 머리를 말리며 저번 달 카드 명세서를 떠올렸다. 잊으려고 할수록 순서대로 또렷이 떠올랐다. 학자금 대출, 부모님의 빚, 지방으로 ‘유배’된 본가.
서윤의 부모는 한때 ‘잘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산층 이상’이었다. 서윤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사업 실패를 하여 빚이 누적되고 가세는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그렇게 서윤에게 남겨진 건 ‘가난한 금수저’라는 정체불명의 정체성이었다.
8시 55분 회사 복도. 서윤은 출근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였다. 남들과 너무 다르지 않게,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신발 소리를 죽이며 기계처럼 인사를 나눴다.
“서윤 주임님, 안녕하세요.”
옆자리 신입사원 백예주가 말했다. 29살 예주의 얼굴은 오늘도 깔끔했다. 가지런히 정돈된 머리, 구김 없는 보세 셔츠. 그 셔츠 사이에 드러나는 희고 가느다란 손목. 뚜렷한 이목구비, 도톰한 입술. 검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주제에 묘한 분위기와 소박한 웃음이 공존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이상하게도 그는 신입 치고 매사에 지나치게 태연했다.
“어, 예주 씨도.”
서윤은 입꼬리를 겨우 올렸다.
“오늘 불타는 목요일이네요. 하루만 더 버티면 금요일! 그쵸?”
“그러게. 화이팅하자.”
점심 무렵, 사내 카페에서 동기 준희와 둘끼리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준희가 말했다.
“아, 근데 예주 씨 금수저라는데? 아빠가 어디 중소기업 사장이라나? 갑자기 소문 돌더라.”
“뭐?”
서윤은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진짜래. 외제차 타고 다닌다던데? 며칠 전에 지하주차장에서 누가 봤다더라고.”
서윤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흔한 루머였다. 단지 말투가 정돈돼 있고, 디올 립밤 좀 발랐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얘기가 붙을 수도 있었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예주는 서윤과 같이 일한지 1년이 돼 가는 신입사원이었는데, 어버버 거리며 긴장한 상태로 일을 배우던 첫날이 아직도 기억났다.
“주임님… 이거 어떻게 하나요?”
“이거가 뭘 말씀하시는 거예요? 정확히 말씀해주셔요.”
“앗… 그게…”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었던 예주는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고서 다시 말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모습이 나름 귀엽기는 했다.
예주는 기본적으로 일 머리 없는 말투, 취업하기에 불리한 경기권 지방대 4년제 ‘국어국문과’ 전공, 말 좀 걸어주면 순박하게 웃는 표정, 하나 같이 만만해 보이는 구석 투성이였다. 그래도 야근수당 안 주는 이 회사에서 굳이 야근해가며 악착같이 일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도 보이곤 했다. 그것도 가끔은 미련해 보일 정도여서 불쌍하게 느껴지곤 했다. 키도 훤칠하고 몸매도 태가 좋았는데 그에 비해 사람이 순해보여서 나름 포스 있는 겉모습이 아까워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예주가 평생 일 안 해도 된다는 그 금수저라고? 그럴 리 없었다.
어느 덧 오후 6시 퇴근길, 서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그래, 예주 말대로 오늘은 신나는 목요일이었다. 얼른 1층으로 내려가고 싶은데 회사 건물에 있는 엘리베이터 4개 모두 도착할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건물 사람들 전부 퇴근 중인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서윤은 비상계단으로 내려갔다. 1층에 가까워지는데 누군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응. 아니 식사 예약은 금토만 되는 거잖아. 응.”
예주였다.
서윤은 어째서인지 점심시간에 들었던 예주에 대한 가십이 떠올랐다.
지하 1층 주차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서윤의 발길이 밑층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옅게 두근거렸다. 주차장 문을 소리 안 나게 살며시 닫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예주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가는 방향 끝에 혼자 빛나는 차량이 하나 있었다. 눈에 익은 수입차 브랜드, 작년식 빨간 벤틀리.
아니야, 가지 마. 거기로 가는 게 아니라고 말해줘. 서윤은 주차장 기둥 뒤에서 예주를 지켜봤다.
“아빠, 주말에 또 스쿼시해? …응. 아니, 그래서 세무사는 뭐래? …어, 나 그 분 좀 무례한 것 같던데.”
아니나 다를까 예주는 그 차에 다다랐다. 차 키를 꺼내 문 잠금을 푸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삑삑 하는 소리에 서윤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차는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그 날 밤 작은 원룸에 돌아온 서윤은 물끄러미 천장을 보았다.
‘갈 때까지 갔네, 이서윤.’
지금 이 순간 서윤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여자였다. 손에 방 불 켤 힘도 없었다.
이 250만원 월급으로는 집세 내고 생활비 쓰면 저축은커녕 적자다. 회사를 잘리면 말 그대로 끝이다.
집안이 힘들어지기 전, 부촌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를 다닐 때 괴팍하기로 소문 난 남성 영어 교사가 있었다. 원숭이를 닮았는데 눈썹이 매서운 모양새였다. 50대인 그는 반에 있던 여고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너네 몸 팔고 살아요. 지금 열심히 해요. 알겠어요?”
직접 들었을 때 서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예쁘거나 공부 잘 하는 여자애한테는 잘해주고, 못생기거나 공부 못 하는 여자애한테는 표정과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런 발언은 대놓고 문제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교사, 당당히 교감 자리에까지 올라갔었다.
열심히 공부 해서 인 서울 4년제 나왔는데 지금 씨발 이 모양입니다만. 어두운 방에서 서윤은 하, 웃었다.
이러다가 동창 민수처럼 ‘데이트 알바’를 하게 되는 거 아닐까?
동창 지민수는 서윤네 집안보다 더 대차게 망해 아예 사립고등학교에서 지방에 있는 이름 모를 고등학교로 전학 간 여자였다. 얼마 전에 오랜만에 만난 민수는 밝게 말했었다.
“서윤아, 이건 그냥 서비스직이야. 연기하듯 웃어주고, 말 잘 맞춰주고. 부업으로 나쁘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 말이 오히려 서윤에게 공포로 다가왔었다.
“쿠팡을 뛰면 되잖아.”
“그것도 맨날 나오면 눈치 줘. 우리 체력도 약하잖아.”
그러고 보면 이런 일도 있었다. 서윤은 클럽 룸 테이블에 합석했다가 스폰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날 서윤은 웃으며 “죄송해요. 그런 거 안 해요.”라고 말했지만, 순간 한 켠에서 ‘그래도 되지 않을까?’하는 속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기억이었다. 그런 마음이 잠시라도 들었다는 것 자체가. 나는 송파구에서 태어나 강남에서 자란 여자였다고.
백예주, 그런 사람도 만만치 않게 불쾌했다.
예쁘고 부유하고, 티 안 내는 척 하면서 다 가진 사람. ‘고급스러운 가짜 겸손’이었다.
사실 예전부터 특유의 이질감이 있긴 했다. 그게 ‘기품’이었구나.
잘도 나를 속였겠다. 백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