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루트, 드럼, 피아노를 번갈아 연주하는 남자아이 -
첫 번째 아들. 그는 지난해 중학교에 입학하여 밴드부를 지원했다. 아이가 원래부터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으니, 친구들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지원했을 거라 생각했고. 악기를 잘 다루는 아이들에 비해 실력이 좋지 않았으므로 오디션을 보고 탈락할지도 모를 일. 관심두지 않았다.
그런 아이가 학교 동아리 공연이나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집에서도 틈이 날 때마다 연주하며 일 년이 넘도록 악기들과 지내고 있다. 여느 때처럼 동아리 연습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가 내게 무심코 물었다.
"친구들이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룰 수 있는 건 부자라는 의미래요. 우리 집이 부자였어요?"
대답을 고르다 궁금해졌다. 바듯한 우리의 형편에 아이는 어떻게 세 가지 악기를 다루게 되었을까.
나와 배우자는 국세공무원 9급 동기로, 그마저도 나는 3년 전에 그만두었다. 이젠 7급 공무원의 외벌이, 네 가족의 서울살이. 우리 둘 다 집안 형편이 좋았더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직업이었고, 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밴드부에서 드럼을 담당하고 있다. 드럼이 필요치 않은 곡이나 플루트 연주자가 부족할 땐 플루트 파트로 참여하고, 음악 수행평가가 있거나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피아노를 연주한다. 세 악기 모두 잘하지 않지만, 어설프게 배운 것들을 원 없이 즐기고 있는 셈이다.
힘든 날이면 말없이 들어와 마음에 드는 악기로 골라 연주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면, 서툰 음빛깔을 넘어 난 그저 그가 부러울 때가 있다.
시작은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한 방과 후 수업이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탓에 이른 하교 후에 심심하다며 방과 후 수업을 요일마다 골라서는 신청해 달라 청했고, 그중 하나가 플루트였다.
피아노도 배운 적이 없는 아이는 악보를 볼 줄 몰랐다. 금방 싫증 낼 것으로 짐작하고 온라인에서 가장 저렴한 플루트를 주문했다. 악기를 따로 구매해야 하는 탓에 수강생이 많지 않았고, 그것이 아이에겐 좋은 기회가 되었다. 어쩌다 그가 소리 내는 것을 들을 때면 소음 그 자체였지만, 계속 배우겠다고 아우성치던 탓에 수업이 폐강될 때까지 1년 조금 넘게 그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가 플루트를 배운 것은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이 전부였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수업이 악기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고 청한 일이었기에 소음에 가까운 소리로 연주할 때에도 기꺼이 응원해 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무언가를 즐겁게 시작하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던지도 모르겠고.
플루트를 소리 내는 방법과 악보 보는 법을 배우는 데 1년이면 충분했던지, 고학년이 되어 장기자랑을 할 때면 매번 연주하던 짧은 동요를 플루트로 연주했다. 피아노에 비해 보편화된 악기가 아니었으므로 실수 연발인 연주에도 멋진 박수를 받았고. 아이들의 응원 어린 박수 덕분이었을까, 5학년의 아이는 플루트를 더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근처에 플루트 학원은 보이지 않았고 개인레슨을 받기엔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한참을 알아보다 한 피아노 학원을 알아냈다. 피아노를 배우면 보조악기 하나를 가르쳐 주는 곳, 보조악기는 일주일에 한 번, 20분 정도. 바이올린, 기타, 플루트, 드럼 정도의 악기 중 선택이 가능했다.
그렇게 피아노는 절대 배우기 싫다던 아이가 플루트를 배우러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시작했다. 하나 한 달 만에 플루트를 담당하던 선생님이 그만두면서 어쩔 수 없이 아이는 드럼을 선택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드럼에 빠진 계기가 된 것이다.
드럼을 배우러 가던 피아노 학원은 집에서 멀어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했다. 혼자 넘어지며 사고가 나 다리도 다치고 손가락도 부러진 탓에 그만둘까를 여러 번 고민했지만, 그때마다 아이가 울부짖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녔다. 덕분에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피아노 실력마저 금시에 늘었고, 좋아하는 음악은 무엇이든 연주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아름다운 소리를 내진 못하지만.
아이의 중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엔 언제나처럼 숙제하듯 산책을 하다 도서관에서 걸어 둔 현수막 위에 '드럼'이라는 두 글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중학생인 된 아이는 토요일마다 도서관에서 피아노와 드럼을 배우고 있다. 구립도서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라 수강료가 저렴하고, 악기나 시설이 훌륭하며, 선생님들 모두 열정적이다.
피곤해진 몸을 말아두기 쉬운 토요일 오전 시간을 본인이 원하는 것으로 채우고 있는 덕분에 다른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아이는 주말을 기다린다. 그야말로 감사한 일이다.
방과 후 수업이나 도서관 프로그램은 수강료가 저렴한 편이라 당장의 성과를 내기 위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면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시작점이 될 수 있고, 악기에 대한 아이의 호불호를 알아보기에도 부담스럽지 않다.
거기에 학교의 밴드부 동아리 활동은 음악 선생님의 지도 아래 학교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 실력향상과 더불어 학교생활 적응에도 도움이 되었다. 여러 종류의 악기를 다루는 다양한 친구들과 음악 아래 어우러지며 연주 실력이 성장하는 것과는 별개로 책임감이나 연대감, 성취감과 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배우며 마음도 키워갈 수 있었다. 중학교 진학 후 학업이나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느꼈던 아이에게 큰 전환점 되어준 셈이다.
물론 흘려 쓴 문장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매번 경쟁률이 치열한 도서관 프로그램의 수강신청에 애를 먹고, 싸구려 플루트가 구깃구깃해지면 어렵게 수리를 알아보기도 하고, 내가 어렸을 때 가지고 있던 피아노를 겨우 울산에서 운반해 와서는 수리에 실패하기도 했다. 본인의 생일마다 비싼 악기를 사달라는 애교 섞인 협박을 논리적으로 잠재우는 일이나 종일 엉망으로 내는 악기 소리를 웃는 얼굴로 참아내야 했던 쓰지 못한 이야기도 있다.
"전 음악 없이 살 수가 없어요. 전공하기엔 실력이 부족하니까, 대학교 가면 마음껏 할 거예요!"
아이가 들려준 이 말에 그동안의 인연들과 우연한 기회에 감사할 뿐, 쓰지 못한 이야기들은 고스란히 사라지고 만다.
크리스마스 새벽, 그의 방 문고리에 디지털 피아노와 연결가능한 헤드셋을 몰래 걸어두었다. 헤드셋을 꽂은 채 신나게 연주를 마친 그가 내 귀에 속삭였다.
"엄마죠? 아주 마음에 들어요. 고생했어요."
비밀한 엄마 산타는 무심히 부인했다. 그리고 헤드셋과 함께 그가 내는 음빛깔이 부디 요요해지길, 따라 그의 마음빛깔도 양양해지길, 간절히, 절실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