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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의 고백

by 린ㅡ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을 안고 나흘 간의 연휴가 이어졌다. 화요일, 연휴의 마지막 날. 아이들은 모처럼만의 등교를 걱정했고, 남편은 출근 걱정을 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월요일은 아무 죄가 없다. 일요일의 다음 자리라는 억울함만 있을 뿐. 이번에는 그런 식으로 수요일이 억울해했지만, 모든 이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수요일을 맞이했으니까.




새파란 새벽, 어렴풋이 잠을 깼다. 나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만지는 아이의 손길 때문에. 캄캄했다. 두 눈을 활짝 뜬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알아채지 못할 테지만, 실눈을 뜨고 그를 관찰했다. 혹여라도 아이가 알아챈다면, 제자리로 돌아가 잠든 척할지 모르니.


순간을 초승달 시야에 담아서 마음에 달빛처럼 새겨두고 싶었다. 마음이 서늘해질 때마다 아껴둔 달빛으로 마음속을 의연하고 처연하게 데우고 싶었다.


얼마만인가. 그가 아기였을 때, 잠든 내 손에 대고 손뼉 치듯 때리며 날 깨우던 때를 제외하면 십 년 만의 일이 아닐까. 이것이 십 년마다 돌아오는 이벤트라면 다음엔 잠든 내 곁에 없을 것만 같아,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눈에 경련이 일 때까지 실눈으로 두고, 간지러워도 이를 꾹 물어 참고, 온몸이 저려 돌아눕고 싶어도 꾹꾹 참았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중학생인 아이의 중간고사가 끝났다. 자사고를 꿈꾸던 아이는 한 과목의 폭락으로 지원조차 의미 없게 되었다. 그는 실망했고 자책했으며 마지막 분노는 내게로 향했다.


어른의 사람이 한 번은 지나왔을 일, 어쩌면 모든 이들이 통과의례처럼 거쳐왔을 사소한 실패. 그 좌절이나 절망감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알면서도 그것이 애꿎은 것들로 변질되고, 관련 없는 것들에 원망이나 혐오 같은 것으로 못나고 못되게 분출되는 순간, 나는 돌아섰다.


나는 미소가면을 쓴 분노유발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도 예외일리 없었다.


내가 조용히 건네던 위로의 말이나 아껴둔 책의 구절들, 힘든 순간 마음을 달래주길 바랐던 영화의 장면들, 메모 섞인 글들. 모든 것이 속절없이 무용했다. 그만하기로 했다. 나는 누군가를 위로해 줄 자격이나 재주가 없다는 것을 기어코 망각했구나.



하필 시험 뒤엔 연휴가 이어졌다. 연이은 빨간 날들 틈에 아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이 야무지게 들어차고, 어버이날까지 꼬리를 물어 그야말로 버겁도록 비좁은 한 주를 앞두고 있었다. 한참 전에 예약해 둔 곳으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지만, 아이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을 가늠해 보는 일마저 부담이 될까 봐 관심두지 않았다.


연휴가 끝나는 날, 새벽. 아이가 침대로 올라와 침대 끄트머리에서 내 손 끝을 만지작거린다. 두툼한 손가락으로 나의 손바닥을 문지르다, 잠옷 솔기를 쓸어내리기도 하고, 한참을 매만지다 다시 잠들었다.


어슴프레 깨어 잠이 오지 않아 그랬을지도, 악몽을 꾸고 침대 위로 도망쳐온 것일지도, 문득 미안한 마음이 일어 그랬던 건지도 모르지. 그것이 무엇이든 적막하게 마음을 쓰다듬는 일이 좋았다. 비밀스레 밤의 온기를 나누는 일이 혼혼했다. 고요함에 따뜻함이 더해진 감감한 시간이 생경하도록 생생하게 남았다. 여리고 잔잔했던 새벽빛 찰나가 연휴의 전부였다.


그는 온몸으로 코를 골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우리는 달랐고, 여전히 다르다.





얼마나 시간이 남았을까. 우리 이 새벽처럼만, 잠연한 다정함에 유영하다 헤어지자.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초승달 모양의 새벽빛처럼 희미롭게, 하염없이 사랑해 보자. 아니 살아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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