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고개만 내민 애처로운 우편물이 나를 불렀다. 어느 카드사의 리볼빙 서비스에 관한 안내문. 덕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아울러 현재 우리의 재정상태는 어떠한지에 대해 마지막 원단위까지 알알하게 알 수 있었다.
그동안 꿈꾸던 일이나 우울과 사투를 벌이던 일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웠는지, 그간 그것을 에두르고 내가 얼마나 욕심스레 살았는지 온몸이 저리도록 실감이 났다.
사직한 지 4년. 도망하는 이에게 한 치 앞은 존재하지 않았고, 골방에 갇혀 버티는 시간이 전부였다. 새까맣게 구석진 드레스룸에 들어가 한껏 오그려 앉아 문을 닫고 나면 심연한 적막함에 살 것 같았다. 난자한 말이나 칼날 같은 고성, 겁박하는 눈빛과 험상스런 손짓, 깔딱대는 숨, 그런 것들로부터 쫓기지 않고 숨어들 수 있는 유일한 은신처였다.
하나 거칠게 역류하는 숨을 무마하는 일은 불가능했고, 불규칙하게 점멸하는 숨소리는 언제고 고요를 깨뜨렸다. 그것이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였다.
불안한 숨소리, 그것이 항상 나를 쫓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쫓기고 있었다. 나만 나를 쫓았던 시간, 하릴없이 쫓고 쫓기던 시간. 그것이 전부였다.
뾰족해지지 않으려 날카로워진 마음의 모서리들을 접고, 뭉툭해지려 몸을 곱송그리던 시간. 자국을 내며 작아지고 가맣게 뭉그러지던 시간. 아무것도 없던 시간과 말갛게 비워진 속, 내동댕이쳐진 껍데기. 형체를 잃고 소리마저 상실한 채, 새카만 백지가 되어가는 시간들을 그런 줄도 모른 채 흘려보냈다.
4년이라, 한참이 흘러버렸다. 한참을 버려버렸다.
마구 도망했지만 여전한 현실이었고. 여전히 쫓기는 현실과 그것을 상냥한 문체로 곱게 나열해 놓은 문장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름답지 못했다. 정신이 번득했다. 가냘픈 순백의 편지지에 느닷없이 따귀를 맞은 양 멍하니 앉았다가, 하얀 밥을 지었다. 가족들이 절절하게 허기지는 저녁시간이 쫓아오고 있었으므로.
어서 밥을 짓고 다시 쫓길 준비를 해야 했다. 한동안 호기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글을 끄적거릴 수도, 책을 펼쳐선 고운 문장들을 빈 속에 담을 수도 없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형체도 없이, 소리도 없이 맹렬하게 쫓아오는 것들이 무서웠다. 얄따란 경고장이나 앙상한 마음 같은 것들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혼자만 안고 있었을 시간, 당신은 얼마나 오랫동안 외로이 마음을 졸였던 걸까. 담담한 척 지내느라 종종 조각이 난 눈빛을 하고선 대답을 놓쳤던 건가. 서운히 당도했던 당신의 모습들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말하지 그랬냐고 물어봤자, 소용없겠지. 날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다음번엔 무슨 일이든, 나누기 어려운 일이라면 더욱 나누자 청했다.
뒤늦게 아는 일이나, 무방비한 상태로 맞이하는 일, 무지막지하게 내던져지는 일이 내겐 최악이니까. 순식간에 가족들을 위한 밥을 짓고 있는 내가 가장 악랄한 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새해엔 전에 없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지냈다. 먼 곳으로 발령이 난 당신은 하루가 버거워 보였으므로 나는 아이들을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을, 감히 거대한 조건을 달고선 찾아야 했다. 그것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직 후 나를 가두어 지낸 시간을 허물고 당장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일이 두려웠다. 그럴 때면 당신이 마지막에 놓쳐버린 그 친절한 경고장, 그 안에 나란하게 앉은 숫자들을 떠올렸다. 부러 내가 좋아하는 책 사이에 숨겨두고, 두려운 마음이 스멀스멀 일 때마다 꺼내어 마주했다. 초라한 두려움은 거대한 두려움 앞에선 꼼짝없이 힘을 잃고 말았으니까.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으니까.
허한 속에 새카만 어둠을 꿀꺽 삼켰다. 덕분에 새하얀 겨울밤이었다. 눈이 부시도록 흰 눈이 내렸고, 흰 종이를 든 손은 시렸다. 어둠이 익숙한 이에게 희고 환한 것들은 불편했다. 호흡이 빨라졌다. 숨이 가빴다. 다시 쫓기고 있구나.
쫓길 준비를 마치지 못한 이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울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용맹스레 휘날리는 눈발에 대고 절절하게 기도했다. 속이 너울거렸다. 함부로 삼킨 어둠을 토해냈다. 그것조차 나의 것이 아니었다.
하얀 쌀을 꺼냈다. 불순한 것들을 걷어내고, 불온한 것들을 솎아냈다. 불투명한 것들을 흘려버리는 참에 속울음마저 게워 버렸다. 하나 남은 것마저 떠나보내고, 순정한, 순수한 것들만 모아 순백의 밥을 지었다. 나는 마음의 낱알을 그러모아 밥을 짓는 사람이니까. 고작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