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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Jul 02. 2022

사직 후 1년 :)

15년을 혼자 바라 온 두려웠던 결정에 벌써 1년이 지났으니 것도 남겨두어야지!


사직 결정 전에 참 많이 떠올렸던 순간이었다.

'그래! 그만하자! 그럼 난 뭘 하지?'

그리고 참 많이 들었던 말들이 있다.

"그래! 그만두면 너 도대체 뭘 할 건데?"


도대체 뭘 하고 있나 나도 궁금한데 남겨볼까?




울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서울 소재 대학교를 가게 20살부터 나는 혼자 서울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서울대 아니면 서울에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던 규칙을 어기고 내가 꾸역꾸역 올라온 서울이었기에 들어갈 당시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학비를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었고, 월세와 용돈은 내가 벌어서 생활했다.


울산에서 벗어나고 싶어 올라왔지만 지극히 소심하고 사람과 어울리기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나의 성격으로는 대학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과외로 월세를 충당했고, 각종 아르바이트로 용돈벌이를 하고, 학비는 장학금으로 일부라도 충당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사람들이 적은 시간도 쉴 틈 없이 양파 2망과 계란 백개를 깠던 분식집, 새벽까지 이어지던 대학로 바, 예쁜 유니폼이 맘에 들어 지원했던 어여쁜 카페, 하루 온종일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 다니며 대기하다가 필요할 때마다 모션을 취하던 영화의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TV 방청객 등 내게 대학교 생활은 모두 삶을 살아가기 위한 돈벌이 생활에 맞추어져 대학교의 낭만이나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프다고 대신해 줄 사람도 구할 수 없었으니,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몇 년 전부터 울산에 내려갈 때마다 엄마가 날 보다 엉엉 우신다. 울산과 맞닿아있는 경주에 함께 꽃놀이 갈 수 있는 때에 맞춰 울산에 내려가곤 했는데, 당신의 딸은 한 번도 저렇게 친구들과 노는 걸 못 봤다고 불쌍하다고 크게 우시는데 마음아프다. 당신 또한 그러지 못하고 살아온 삶이라는 걸 알기에 나 또한 당신이 안쓰러워 같은 음으로 속으로 운다. 


지금 이렇게 웃고 있는 나를 보며 당신의 마음이 더 아프신 것임을, 힘든 시간들에 진정으로 당신이  편에 있어주지 못한 후회도 내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떤 때는 나도 원망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의 인생이고, 내가 결정해야 했던 일들이고, 그 누구도 강요한 적이 없으며, 나 스스로 온갖 눈치를 보며 남들이 바라는 모습으로 살아왔음을.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살아왔음을.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 알았으니까. 그거면 됐다.


2019년 어느 날, 국가 건강검진 독촉 문자가 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부랴부랴 급하게 끝낸 며칠 뒤, 아이와 놀이터에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산부인과인데 오셔서 결과를 빨리 들으셔야 한다고 했는데 아이가 안 가겠다고 도망가는 바람에 다음 날 갈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날 상담 내용은 거의 단어 위주로만 간략히 기억이 난다. "보시면 궁경부암... 2기 정도... 되어 보이죠?"라는 말부터는 정신이 멍해져서 의사 선생님의 움직이는 입술만 보이고 소리가 멀어져 버렸다. 그때 나는 내가 잘못 듣고 있는 것이겠지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간이 흐르고 몇 달이 지나 정신이 들어서 보니 정잘못 들었다. 지금 타 병원에서 검진해 보면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상태를 말했던 듯싶다. 여하튼 그 일로 이렇게 큰 결심을 하고 나를 찾아가고 있으니 그거면 되었다. 마지막에 "의심스러우시면 몇 개월 뒤에 다른 병원 가셔서 검사해 보세요. 단 그동안 꼭 건강에 신경 쓰세요. 스트레스 절대 금물입니다."라고 말씀해 주신 기억은 또렷이 난다. 왜냐하면 내가 그날부터 스트레스와 이별을 고하기 위해 직장과 이별하기로 마음을 먹으니까.


왜인지 억울한 맘이 들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부모님에게도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는 첫째 딸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최대한 스스로 해결했다. 힘겹게 살아오신 부모님께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 중앙에 커다란 앞니 두 개, 과잉치가 있어 토요일마다 온갖 병원을 다녔고, 친절하게 말해주신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의사분들의 말씀을 되새기며 언제 떠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도록 올곧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내가 살면서 한 번도 화 본 적이 없는 이유였다.

심한 아토피를 겪고 있는 남편과 사랑으로 극복하겠다 다짐하며 했던 결혼생활에 극심한 아토피를 가진 아이 둘을 낳으며 밤마다 쉴 새 없이 긁어 피범벅이 되는 아이의 이불보를 보면서 밤마 잠을 제대로 자기가 어려웠고, 둘째마저 심한 아토피와 아나필락시스가 있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부모님의 바람으로 선택하게 되었던 직장은 내겐 간절히 벗어나고 싶지만 감히 그럴 수 없는 고통의 공간이었고, 결국 호흡곤란이 심해진 뒤 정신과에서 처방해 준 약을 먹으면서 살아내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늘 단호히 대답다. 절대 안 돌아간다고. 이제 겨우 이만큼 살아내었는데 다시 더 많은 날들을 또 살아내야 한다면 끔찍하다고. 그것이 돌이켜 행복한 날들이라고 해도 나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다시 돌아가도 더 잘 살아낼 자신이 없을 정도로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내며 최선을 다해 살아냈는데.. 허망하고 슬펐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억울할 일이 아니었는데 괜히 내 주변의 탓으로 다 돌린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참 좋았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건강해지고 있다. 내가 느낄 수 있다. 난 아직 수입이 없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느라 지출은 있고, 그에 따라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임에도 경제적으로 환산 불가한 행복함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저축하는 중이다. 로 나는 건강해지는 중일 테다.


처음으로 예쁜 하늘찍어보았다. 날씨가 좋으면 날씨가 좋아서 눈물이 났고, 비가 내리면 비가 내려 눈물을 흘렸던 지난날들에 비하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이제 아름다운 하늘을 웃으며 볼 줄 알고, 비가 내리면 빗소리마저 음악처럼 즐길 줄 안다. 그 모든 것에, 삶의 하루하루에 감사함을 가질 줄 안다. 이것보다 멋진 일이 있을까?


아직은 내 안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불안정한 게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호흡이 힘들어 참고 참다 병원으로 달려갔다가 정신과로 가보시라는 말에 화가 나 뛰쳐나간 적도 있고, 갑자기 온갖 불안감과 슬픔에 눈물이 멈추지 않고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는 날도 여전히 있다. 하지만 이제 내가 나를 다독이는 방법 또한 조금 안다. '나는 지금 정상의 상태로부터 잠시 벗어난 것뿐이다!'를 인식하는 것부터 '그럼 지금 난 무엇이 가장 하고 싶은가? 지금 나의 감정을 당장에 바꿀 수 있는 무언가는 무엇인가?'까지.' 나는 나를 치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처방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약국에 내밀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 있지만, 내게는 더없이 효과가 좋은 온전히 나를 위한 처방전이다. 


이렇게 사직 후 나는 매일 이 처방전을 따라 냠냠 치유의 순간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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