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를 만든 내 선택들 (해병대/전역)

선택이 모여 내가 됐다 - 세 번째 선택, 해병대 대위 전역

by 국지호

나는 서른 살 무경력 백수다.
열심히 살았다고 믿었지만, 지금의 나는 많이 초라하다.

그래서 요즘 자주 묻는다.


나는 어쩌다 지금의 내가 됐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과거의 선택들을 복기해야 한다.


이번 글은 군대에서의 이야기다.
정확히는, 군대에서 내가 했던 선택 중
가장 오래 남았던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군대를 가면 누구나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어떤 병과를 갈 것인가?’


나에게도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전공을 살려 특기병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보병을 선택할 것인가.


전공을 살리면 전역 후 경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군대에서 했던 업무가 그대로 ‘직무 경험’이 된다.


하지만 특기병과는 TO가 적다.
정해진 자리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군인으로써 성장에도 한계가 분명하다.


반대로 보병은 다르다.
TO도 크고, 보직도 많다.
능력만 인정받는다면
진급과 직책에서 기회가 열려 있다.


나는 군인이 되기 위해 ROTC를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하는 거면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남들처럼 ‘무난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후보생 시절,
학군단 단장님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라에 쓰임이 다할 때까지 가능하면 군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단장님은 내 말을 듣고 짧게 답하셨다.

“나라의 쓰임에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날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돼라.”


그 말이 꽤 멋있게 들렸다.

군대를 경험하기 전의 나는
상명하복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고,
나라를 위해 일하고 돈을 번다는 것에
어떤 명예 같은 감정도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단순했다.

보병을 선택하자.
이왕이면 끝까지 가보자.



나는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고
5여단에 배치됐다.

해병대 안에서도 5여단은 모두가 선호하는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강화도 옆 교동도의 한 소초에서
소초장으로 첫 임무를 시작했다.

전방의 군생활은 내가 상상했던 ‘열심히 하면 인정받는 곳’과는
조금 다른 세계였다.

그곳에는 출퇴근 개념이 없었다.

생활은 ‘숙영’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퇴근을 하긴 하지만
중대장님, 인접 소초장들과 함께 퇴근 할 수 없고
같은 소초 간부들과도 함께 퇴근 할 수 없다.

즉 퇴근하면 나 혼자다.

택시를 타고 조용히 관사로 들어가
치킨 한 마리 시켜 먹고
깊게 잠들었다가
다시 택시를 타고 소초로 복귀했다.

반복되는 생활.



물리적으로 힘든 건 버틸 수 있었다.
진짜 힘든 건
정신적인 열악함이었다.

소초는 24시간 작전해야 했다.
상황이 발생하면 그 원인이 무엇이든
소초 총원이 움직여야 했다.


심지어 그게
동물 때문에 발생한 오경보여도
절차는 똑같았다.


소초원들에게 6시간 연속 수면조차 보장하기 힘들었고,
누군가 휴가라도 가면 남은 사람들의 부담은 두 배가 됐다.


“나는 감시장비 지키려고 해병대 온 게 아니다”
불만을 토하는 병사들을 달래는 것도내 몫이었다.


그리고 소초장의 근무는
취약시간대인 새벽 1시부터 일출까지였다.


몸이 망가지는 신호를 느끼면서도 그걸 무시하며 버텼다.

그 와중에 내륙부대에 있는 동기들은
여행을 다니고, 자격증을 준비하고,
자기 삶을 관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설명하기 힘든 박탈감을 느꼈다.




2년 정도를 그렇게 보내고
나는 대대 인사과장으로 보직을 바꿨다.


그리고 그때가
내 군생활에서 가장 무거운 시기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인사과는 단순히 인사 업무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휴가자 관리, 복귀자 관리, 백신 접종, 동선 파악,
관심병사 관리, 수당 관리, 진급 대상자 관리,
병영문화 혁신까지.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나는 매일 7시 30분에 출근했고
22시가 돼서야 퇴근했다.

열심히 하고 싶었지만 실수는 계속됐다.

자존감도 깎였다.


대대장님께서 내게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말도 똑바로 못하냐?” 그 시절 처음으로 알았다.

우울증이 왜 생기는지, 정신이 왜 무너지는지.




이후 본부중대장을 맡게 됐다.

본부중대는 수송, 통신, 저격, 조리 등
각 부서를 통합 관리해야 했다.

그때 나는
내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정확히 마주했다.


나는 한 팀을 이끄는 건 할 수 있었지만,
서로 다른 여러 팀을 하나로 묶는 건
잘하지 못했다.


임무를 나눠주고 조율해야 했지만
나는 그게 불편했다.

뒷말 나올 바엔

그냥 내가 다 해버리는 게 편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부대는 삐걱거렸고, 불만은 쌓였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전역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실 나는 임관할 때
스스로 두 가지 기준을 정해놨었다.

첫째,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면 전역한다.

둘째, 내 인생 목표는 화목한 가정이기에
가정을 꾸릴 수 없는 환경이라면 전역한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 두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역을 결심했고
마지막 1년은 대외부대인
해군 3함대로 전출을 희망했다.


그곳의 생활은
거짓말처럼 달랐다.

출근과 퇴근이 있었고,
개인 시간이 있었고,
사람답게 숨 쉴 수 있었다.


처음엔 천국 같았다.

그리고 몸이 편해지니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전역을 다시 생각해볼까?’




그런데 한 사건이
그 마음을 완전히 접게 만들었다.

전대장님(대령)과 초소를 순찰하던 중
어딘가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나는 초병들을 확인하러 갔다.

수색을 마치고 돌아와
담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때 전대장님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했다.

“몸수색할 때 손등으로 했냐, 손바닥으로 했냐?”

초병들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분 나빠하진 않았는지,
혹시 성추행으로 신고될 가능성은 없는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앞으로 이런 문제는 더 많아질 거고,
나는 그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걸.

그리고 확신했다.


나는 군인으로 오래 남을 사람은 아니구나.

나는 어차피 가야 하는 군대라
ROTC를 선택했고,
해병대를 선택했고,
보병을 선택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능력의 한계를 봤고,
조직의 한계도 봤고,
나라는 사람의 성향도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알게 됐다.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군생활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는

끝도 없이 많다.

감시장비에 찍힌 북한 자주포 훈련,
한강 중립구역에 북한군 3명이 짝수영으로 도달했던 날,
헤엄치며 떠밀려온 독수리,
완전무장으로 초소에 붙었던 밤,
K9이 소초에 대기했던 순간,
정신적으로 무너져 의가사 제대한 병사,
해병대사령관에게 새해 전화를 받았던 일,

5부 합동조사를 받았던 경험까지.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다.

나는 군대에서 성장했지만,
군대는 내가 끝까지 갈 길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전역했다.

그리고 그 선택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다음 글에서는
군대를 나와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이 나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계속 이어서 기록해보려 한다.


선택이 모여
내가 됐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선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