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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Feb 21. 2024

커피 머신이 나를 살게 합니다

우울해도 아아는 포기 못하지

얼마 전 시드니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 부부가 씨엠립을 방문해 주었다. 그들이 씨엠립행 비행기표를 끊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우울증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때였고, 내가 시드니에 있었을 때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던 친구라 당장이라도 오라고 제대로 환대해 주겠다고 장담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씨엠립으로 올 즈음에 나의 우울증 증세는 가장 피크였고, 나와 남편은 이미 씨엠립에서 거의 도망치다시피 (아무것도 쫓아오는 것도 없는데,) 시댁 식구가 있는 프놈펜으로 거처를 옮긴 후였다.


우울증을 정신과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겪고 있을 때였다. 전신에 염증이 난 것처럼 누군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몸이 쓰라렸고, 특히 오른쪽 팔과 어깨의 극심한 신경통으로 혼자서는 팔을 움직이기도 힘들던 때였다. 우울함은 고사하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였다.


남편도 고작 몇 걸음도 움직이기 힘든 내가 과연 친구를 만나러 씨엠립까지 갈 수 있을지 심히 걱정했고, 심지어는 자기 혼자 다녀올 테니 프놈펜에서 쉬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할 정도로 내 심신은 약해 있었다.


그래도 나를 보겠다고 인도양을 건너오는 친구 부부를 안 만날 수는 없었다. 일단 씨엠립으로 가보자.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씨엠립으로 향했다. 씨엠립으로 가는 동안 나는 내 우울증을 친구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공황 증세가 오기도 했고, 불안 때문에 온 근육통 때문에 진통제를 무슨 사탕 먹듯이 수시로 까먹어야 했다.


다행히도 막상 친구 부부를 만나는 동안에는 우울증 증상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고, 심지어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기까지 했다. 어쩌면 예전의 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갖게 되었다. 그전에는 '나는 끝났어. 이미 망가졌어', '예전의 나의 모습은 더 이상 없는 거야'라고 생각했다면, '병원을 가서 치료를 해야겠다', '예전의 나를 되찾아야겠다'라고 결심한 것도 친구 부부를 만나고 난 후이다.


씨엠립에서 재회한 친구 부부는 집들이 선물이라며 에스프레소 커피 머신을 선물해 주었다. 20킬로가 넘는 머신을 멀고 먼 시드니에서부터 들고 온 것이다. 하얀 키친에 잘 어울릴 거라며 색도 일부러 흰색으로 정말 어렵게 구했다고 했다. 친구 부부가 이 에스프레소 머신을 출국 전 제시간에 배달받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에 대한 에피소드를 푸는 동안 나는 뽀얗고 고운 자태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바리스타로 오래 일했다. 대학생 때 우연히 하게 된 커피숍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매니저로도 있었고, 그 경력으로 더블린에서는 로컬 커피숍 슈퍼바이저로 일하기도 했다. 처음 시드니에 도착해서도 영주권을 얻기 전까지 한 동안 바리스타로 일했다.


한 번도 커피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은 없기에 이론적인 지식은 많이 없었지만, 에스프레소가 떨어지는 모습만 봐도 커피빈 그라인딩이 적당히 되었는지, 우유를 스팀 내는 소리만 들어도 잘 된 거품인지 망한 거품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몸으로 직접 익힌 경험치가 있었다. 한 때는 작은 커피숍을 차리고 싶다는 꿈도 있었고, 그게 안되더라도 내 집이 생기면 꼭 나만의 홈카페를 가지고 싶었다.


커피 머신을 처음 열어 보았을 때는 이 고운 머신을 당분간은 씨엠립에서 사용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애달픈 마음부터 들었다. 꼭꼭 싸 두었다가 다시 씨엠립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 열어서 쓸까도 했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예쁘고 아까워 일단 프놈펜으로 들고 왔다. 남편은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프놈펜에 도착하자마자 신이 나서 박스를 열고 커피 머신을 설치했다.




막상 커피 머신을 설치하니 무력하기만 하던 내 일상에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집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 나는 온 가족의 커피를 만드는 담당을 맡게 되었다. 매일 아침 8시 30분, 그리고 오후 3시 30분. 남편과 시아버지는 아이스 카푸치노, 시어머니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그리고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루 두 번, 시간이 되면 나는 기계처럼 커피 머신 앞에 섰다. 커피빈을 그라인더에 조심히 넣어주고, 심혈을 기울여 에스프레소를 뽑고, 정성스레 우유 스팀을 내어 커피 네 잔을 만들었다. 그 후 포터 필터와 스팀피쳐, 커피 머신을 꼼꼼히 닦고, 주변에 떨어진 커피빈까지 정리하면 30-40분이 후딱 지나갔다. 눈을 뜨고 깨어있는 시간 14시간 중 단 1시간이라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 생길 수 있다. 아침에 눈뜨는 것조차 성가셔했던 내가 오직 나만 할 수 있다는 일이 생기자 아침에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주 조금은 쉬워진 것처럼. 한 발 한 발 내디뎌 보자. 항상은 아니지만 어떤 순간에는 나도 꼭 필요한 사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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