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by 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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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야 워낙 유명하니 굳이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할 필요조차 없지만, 이 책을 번역하면서 새삼 떠올린 점은 비유의 천재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기나긴 진화 과정에서 우리 유전체에 유전 정보가 겹쳐서 적히곤 한 것을 팰림프세스트에 비유한다. 책장 구석에 박혀 있던 오래된 종이가 문득 눈에 들어온다. 꺼내보니 뭐라고 적혀 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흐릿하다. 그때 전화가 걸려와서 때마침 놓여 있는 그 종이에 내용을 적는다. 그렇게 겹쳐 적은 글이 바로 팰림프세스트다.

옛날 수도원에서 양피지를 그렇게 썼다고 한다. 버리기 아까우니까, 예전에 쓴 것 위에 다시 글을 적었다.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도 그랬다. 우리 고서도 그랬다면, 새로운 분석 기법을 새서 알려지지 않은 옛 문헌을 찾아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문득 해본다. 그런데 옛 그림 중에도 그런 것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 그림은 뭐라고 할까?

이 책에서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걸 뭐라고 번역하면 좋을까"였다. '겹쳐쓴 글'이라고 하면 괜찮겠다 싶다가도, 그냥 포기하고 팰림프세스트라고 옮기기로 했다. 도킨스는 한 단어를 주제로 삼아 변주곡을 연주하는 데에도 탁월하다. 그래서 그가 비유로 새로 내놓은 단어를 섣불리 우리말로 옮겼다가는 난감한 상황을 겪기 십상이다. 이 책에서 그 단어의 변주곡이 나오지 않았다고 안심할 수도 없다. 다음 책에서 변주곡을 연주할 수도 있으니까. 도킨스의 책을 여러 권 옮기다보니 깨달은 것 중 하나다.

'개구리'라는 단어를 출발점으로 삼아 '개구락자', '개구멍', '개구장이' 같은 식으로 말장난을 친다고나 할까? 도킨스는 철저하게 논리적인 사고 구조를 따라가면서 서술하고, 그렇기에 때로는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초등학생 수준의 내용까지 길게 적곤 하는 양 느껴진다. 그러다가 문득 이 개구리 말장난 같은 변주곡을 접하곤 한다. 좀 있는 양 표현하자면, 나태와 긴장의 변주라고 해도 될 듯하다.

그런데 이런 변주곡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것도 도킨스 책의 한 특징이라는 생각도 번역하다 보면 종종 든다. 한 마디로 앞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까먹는다는 소리다. 이 내용은 너무 쉬운데? 굳이 이렇게 길게 쓸 필요 있나? 우리 중학생 정도면 한 줄로 요약해도 다 알아들을 텐데...하고 속으로 궁시렁대면서 옮기다보면, 어느새 까다로운 내용으로 옮겨가 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책장을 넘긴다. 어? 앞에 뭔 내용이 있었지?...어? 이 비슷한 단어를 다른 책에서 본 것 같은데?...뭐라고 번역했더라? 이런...


과학책 중에는 모를수록 잘 읽히는 것이 있다. 세세한 사항을 모르고, 어려운 내용까지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은 술술 넘기면서 개요만 추린다.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 그 책은 이런 내용이야. 이렇게 말하니, 미술사 책 어설프게 읽고서 미술관에 가서 이건 어느 사조에 영향을 받았고, 저건 어느 화가에게 영감을 얻었다고 지레 짐작하던 창피한 일도 떠오른다. 또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나는 술술 재미있게 읽었는데, 왜 물리학을 공부하던 누군가는 어렵다고 말하는지 의아해 하던 일도 생각난다.

서두가 좀 길어졌는데, 아무튼 하려는 말은 도킨스의 책도 종종 그런 범주에 포함되곤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의 요지는 우리의 진화 역사가 우리 유전체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발현되지 않은 채 우리 유전체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옛 유전자의 파편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고, 염기 서열이 약간 달라지는 바람에 다른 유전자로 바뀌어서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유전자의 조절 양상이 바뀌어서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미래의 탁월한 과학자는 이 진화의 흔적들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화 역사를 읽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말하니, 꽤 잘 요약한 듯하다. 이런 얄팍한 지식의 향연에 계속 심취한 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때로는 그래서 과학이 짜증난다. 오늘 얄팍하면서 멋드러지게 요약할 수 있는 지식이 내일이면 새로운 연구로 헛소리임이 드러나거나, 불확실하기 그지없는 논쟁거리로 전락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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