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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엄마의 미국 라이프

한국과 유럽, 북미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나누다

by 김지향

20세기의 끝자락, 나는 한국인 최초로 세르비아 공화국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모교로 돌아왔다.

15 년간 연구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며 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민음사, 문학과 지성사, 푸른 숲등의 주요

출판사들과 함께 문학의 흥미로운 주제들을 선정하여

대중에게 소개하는 행운을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세르비아 대사관으로부터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공로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2005년 둘째 아들을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한국-세르비아 정상회담에서 통역을 했던 웃픈 사연들도 있었다.

당시 세르비아어 동시통역을 할만한 사람이 없어 거절을

못하고 강행했던 일은 그 정도로 커리어에 진심이었던 나를 대변하는 사건이다.


그러던 내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전임 교원 임용 때 객관적인 실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선임의 주관 평가가 절대적인 권력으로 작용하는 것을 두 번이나

경험하면서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2010년, 당시 3 살과 5 살이던 두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하게 되었다.

육아를 하면서도 나는 커리어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모교 재직 시 쌓은 실적과 연구 계획서로 노벨상 수상자를

무수히 배출한 캐나다 최고의 명문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 문을 두드렸다. 그곳에서 교환교수로

임하면서 나의 ‘진짜 육아’의 서막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교수로 지내던 시절, 교육은 나의 전문 분야였고

학문은 익숙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마주한 현실은

전혀 달랐다.

북미의 교육 시스템은 한국과 사뭇 달랐으며 부모의 역할도 새롭게 정의되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꿈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몫이라는 사실을 몸소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2016년 아이들이 10살, 12 살이 되던 해 나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택하게 된다.

야구 선수를 꿈꾸는 두 아들을 위해 다시 모든 걸 뒤로 하고 미국 텍사스로 이주하게 된다.

바야흐로 진정한 노마드 삶을 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University of North Texas에서 다시 교환 교수 직을 얻고 미국 전역을 누비며 야구 경기를 다니는 ’baseball mom 이되었다, on and off the field.

그렇게 나는 또 다른 배움을 얻는 중이다.

또한 아이들의 꿈을 함께 좇으며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가르치고, 북미에서 다시

배우는 소중한 경험을 나누고 싶다. 학문과 연구보다 더

큰 가르침을 준 것은 바로 부모가 되는 과정이었다.

한국에서 겪은 학계의 불공정에 굴복하지 않고 새롭게

도전한 나의 인생 2막을 통해 비슷한 부당함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료가 있다면 나의 경험을 공유하며 감히

격려를 보내고 싶다.


앞으로 이 글을 통해 한국과 북미의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 부모로서의 성장, 그리고 이민 과정에서 겪게 되는 현실적인 고민들을 솔직하게 나누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6 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언어 학습의

노하우도 공유하고 싶다.

같은 길을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먼저 경험해 본 과정을

소개하면서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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