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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 대학을 졸업한 나는 한 달 뒤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13시간 동안 스위스를 거쳐
베오그라드까지 4시간을 더 날아갔다.
모교인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교환 교수로 계셨던 요반
데레티치 교수님과 사모님께서 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와 주셨고, 나는 낯선 땅에서 석사 과정 유학생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나는 일반 기숙사가 아닌 부엌과 화장실까지
있는 교환 교수 숙소에 배정되었다. 매일 아침 메이드가
청소까지 해주는 이곳은 데레티치 교수님의 영향력 덕분에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석사 과정 첫 수업 시간에야 비로소 이 특별한 대우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고등교육은 한국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대학은 단순한 학위 취득의 과정이 아니라, 학문을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었다.
특히 석사 과정은 전공 분야에서 사회적 경험을 쌓은 후 보다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교수와
비슷한 연배의 학생들도 흔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석사 과정에 입학한 나는 자연스럽게
성숙한 연구자로 대우받았고, 학자를 대하는 유럽 학계의
진지한 태도를 몸소 경험하며 학문적 책임감을 한층 깊이
깨닫게 되었다.
유학 생활동안 나는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인연을 통해 특별한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학부 시절, 주 유고슬라비아 초대
한국 대사로 파견된 신두병 대사 가족에게 세르비아어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유학 중에도 대사관의 각별한
지원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고국의 음식이 그리울 때면 대사관에서 한식을 대접받으며 향수병을 달랠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
그러나 당시 유럽은 격변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1991년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면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구 유고슬라비아는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 선언을 기점으로 내전에 돌입했다.
내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사라예보에서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불과 몇 시간 거리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내전은 유고슬라비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고, 베오그라드도 그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는 역사 교과서에서만 접했던 대공황 시기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몇 주 만에 1000 디나르( 유고 화폐 단위)에 000이 세 개나 덧붙여 1,000,000 디나르로 바뀔 정도의 극심한 경제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생필품을 구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나는 현실과 학문의 괴리를
절감하면서도, 문학과 언어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정 하나로 버텼다.
20대의 패기로 한국인 최초 세르비아 문학 박사 학위를
받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고, 혼돈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신념을 지켜 나갔다.
이러한 경험은 나의 연구뿐만 아니라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학문이 갖는 의미,
그리고 교육이 한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