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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한 게임을 떠나, 내 인생의 로또를 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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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향

때론 세상이 부당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인생은 한순간도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나는 모교에서 15년 동안 연구소

책임 연구원, 연구 교수, 대우 교수 등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학문적 성과를 쌓아가고 있었다.

정부 기관과 학술 진흥 재단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번역서 출판까지 해내며 성실하게 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정당한 경쟁이 불가능한 현실을 목격한 순간,

나는 더 이상 머물러선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학과 선임 교수는 가장 늦게 학위를 취득한 그의 수족 역할을 마다하지 않던 애제자의 전공을 콕 집어, 다른 사람은 지원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무혈입성을 시켰다.

그 후, 또 다른 교수 역시 유사한 이유로 실적면에서 한참

뒤처지는 지원자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전임 교수 자리에

않혔다. 이런 비합리적인 현실을 보며 결심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

누군가는 여자 직업으로 이만한 게 어딨냐며 참고

견디라 했지만, 나는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나의 신념과 능력을 알아봐주는 세상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이다.

결국, 3살, 5 살 두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향했다.


캐나다에서 새롭게 시작된 인생 2막

세르비아에서 함께 학술/문화 행사를 함께 해 온 현지인

교수들은 장문의 편지로 위로하며 내 결정을 응원해 주었다. 세르비아 대사관에서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하며,

여러 신문사와 미디어를 초청해 나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성대한 퇴임식을 열어주었다.

모교에서의 15년을 인정받지 못한 아쉬움을

세르비아 대사관 측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듯했다.


그렇게 막연한 기대감 하나로 도착한 캐나다 밴쿠버.

서울의 아파트 생활에서는 꿈도 못 꿀 일들이 펼쳐졌다.

집 안에서 농구하고, 축구하고, 집 앞 아이스 경기장에서

하키를 했다. 하지만 몇 개월이 흐르자, 연구자로서의

DNA 가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는 무작정 내 연구 성과와 학술 활동 기록을 챙겨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UBC)의 문을 두드렸다. 이 대학은 노벨상 수상자 25명을 배출한 세계적 명문,

하지만 나의 불붙은 도전 정신을 막을 순 없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너무도 허무할 정도로 쉽게 UBC는

나를 받아들였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는 교환 교수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고, 어느새 7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사이 아이들은 십 대가 되어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벽이 있었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던 중,

학문적 성과가 뛰어난학자들에게 연구 실적과 미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심사해 영주권을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추천서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 전형에서,

나는 UBC 학장에게 한 부를 부탁하고 문득 나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던 세르비아 대사를 떠올렸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본국에 계실

거라 믿고 용기 내어 이메일을 보냈고 회신이 왔다.

그의 서명 아래 직함이 보였다.

‘주 캐나다 세르비아 대사‘


그는 내가 캐나다에 있는 지도 몰랐고, 우리는 같은 나라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추천서를 부탁드렸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김 교수, 보통 이런 건 비서에게 맡기는데, 이건 내가 직접 쓰고 싶습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시겠어요?”


정확히 일주일 후, 대사관 직인이 찍힌 추천서가 특별

우편으로 도착했다. 내용을 읽는 순간,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나조차도 잊고 있던 나의 학문적 궤적을 너무도 세세하게

기록해 주셨고, “이런 인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미국은 행운일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결과는?

2주 만에 미국 영주권 승인

불공정한 세상을 원망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세상은

돌고 돌아 기회가 찾아온다.

최근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 대통령이 79 억짜리 미국

영주권을 판매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두 아들에게 79 억 원씩 물려준 셈인가.


만약 모교의 부당함을 견디며 남아 있었다면, 나는 이 로또 같은 행운을 잃었을 것이다.

야구 선수 요기 베라(Yogi Berra)가 말하지 않았던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경기다.

나는 여전히 새로운 이닝을 준비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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