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에 나타난 ‘미움, 증오‘에 대하여
바야흐로 한국 문화는 세계적인 신드롬이 되었다.
블랙핑크는 코첼라의 무대를 압도하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BTS는 타임스퀘어의 초대형 전광판을 장식한다.
이들의 음악은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미국 주요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오르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음식 문화도 그렇다.
김치, 만두, 김밥은 한때 이국적이었던 단어에서 이제는
주류슈퍼마켓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보편적 일상’이
되었다.
한국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변방이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넷플릭스에서는 한국 콘텐츠가 세계 시청자의 스크린을
점령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근에 미국 친구의 추천으로
보게 된 <나의 아저씨>를 ‘미움’과 ‘증오’라는 감정의
키워드로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이 드라마는 따뜻한 위로를 안겨주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 내면에 깊숙이 얽혀 있는 ‘미움’이라는 감정을 매우
긴 호흡으로 다루고 있다.
주인공 이지안은 단순한 ‘가엾은 캐릭터’가 아니다.
그녀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감정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타인을 미워하고, 세상을 미워하고,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한다.
하지만 이 미움은 단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고통받은
존재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 보존의 장치였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고립된 인간은 세상을
미워하게 되고, 고립이 반복되면 증오는 구조가 된다”고
말했다.
이지안은 바로 그 ‘구조적 미움’ 속에 갇혀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미움은 종종 말을 잃은 감정으로 표현된다.
사르트르는 “말해지지 못한 감정은 타인에게 투사된다”고
했다. 그녀의 미움은 외부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자기감정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내면에는 오래전부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 구멍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칠고 무표정한 얼굴로 세상과 거리를 두며,
자신이 받은 무관심을 다시 세상에 되돌려준다.
하지만 그 표정 너머에 있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말하지 못한 슬픔에 더 가깝다.
이에 우리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침묵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다.”
이지안은 침묵으로 미움을 말하고, 무표정으로 자기를
방어한다.
또 다른 주인공 박동훈은 그런 그녀를 의아해하지 않는다.
그는 묻지 않고, 단지 묵묵히 함께 견딘다.
그가 이지안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자신의
미움을 바라볼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그 관찰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미움은 조금씩 그 자태를
잃고, 인간은 다시 말의 세계로 귀환할 수 있게 된다.
시몬 바일은 “사랑은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라고 말했다.
박동훈이 보여준 것은 거창한 이해도, 눈물겨운 공감도
아니다. 단지 그녀를 ‘주의 깊게 바라봐 준 것’이다.
그 시선이 궁극에는 이지안을 살리는 산소 역할을 하게 된다.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미움은 본능이 아니라,
해석되지 않은 감정의 매몰이며, 결국 그것을 복원하는 일은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드라마는 우리 안에 있는 ‘말해지지 못한 미움’을
정면으로 비추었기 때문에 끝나고도 오래 기억에 남게 된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누구를 미워하고 있는가.
그 미움은 혹시, 오래전 외면해 버린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미워하고, 또 미움받으며
하루를 버티기도 한다.
때론 감정을 접어두는 무감각으로 서로를 지나치곤 한다.
<나의 아저씨>는 그런 차가운 사회의 틈에서,
증오나 미움을 감당하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따뜻함에
젖어드는지를 보여준다.
미움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것을 견디게 하는 또 다른 감정, 인간에 대한 믿음, 무심한 친절, 조용한 연대를 느끼며 살게 된다.
우리는 때때로 서로를 미워하지만, 그 감정조차도 결국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또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그래서 미움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