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길 잘했네

계획은 펴지고, 인생은 구겨지던 때의 이야기

by 김지향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그대는 무엇을 하였는가?

—-니체


길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

그 길 끝에는 나만 아는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나는 마음이 급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서두르고 싶었던 건 번역이었다.

그건 단지 학문적 야망이나 경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감사와 약속의 문제였다.


낯선 나라, 낯선 언어 속에서 나는 숱하게 길을 잃었다.

하지만 현지의 친구들과 교수들은 언제나 나의 언어 교사

역할을 해 주었다.

내가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몸짓으로 까지 설명해주었다.

연극배우처럼 목소리를 바꾸고 표정을 써가며, 마치 그

문장 안의 영혼까지도 전해주려는 듯 진심으로 도와주었다. 그들은 내가 작가의 문장에 흠뻑 빠져 그들의 민족혼을

느끼게 하는 것에 사명감마저 가지고 있는 듯했다.

조국에 대한 애정에 선함까지 더해진 그들의 노력은

나로 하여금 세르비아 문학에 깊은 애정을 갖게 했다.

이렇게 내게 말하곤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제발 우리 문학을 잘 소개해줘.

우리는 작은 민족이지만, 우리의 문학은 결코 작지 않거든.”


나는 그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깊게 새겨두었다.

여러 작품에 대한 고민 끝에 세르비아 문학사의 거장중

한명인 다닐로 키쉬의 <안디의 벨벳 앨범>을 번역했다.

내게 주어진 첫 번째 번역 과제이자, 스스로에게 건 첫 번째 약속의 실현이었다.


1999년 첫 번째 출간 책이었으므로 나는 모교의 선배

교수들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책을 받아 든 한 선배 교수의 첫마디였다.

“평생 책 한 권 내기도 어려운 일인데, 용감하네. 수고했어. 한번 읽어보지.”


아마 그 말속에는 경계와 우려, 그리고 약간의 격려가 모두 섞여 있었으리라.

그때 나는 직감했다.

내 앞길은 만만치 않겠구나.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14권의 저서를 썼고, 29권의 번역서를 한국과 세르비아에서 출판했다.

한 권 한 권은 외로움 속에서 낳은 문장들이었고,

어쩌면 사명을 지닌 우정의 결과물이었다.


괴테는 말하지 않았던가.

“Ich bin ein Mensch, das heißt ein Kämpfer.”

(나는 인간이다. 그것은 곧 ‘싸우는 자’라는 뜻이다.)


이따금 나는 내가 이토록 달려온 이유를 잊곤 했다.

한국을 떠날 때는, 이 모든 노력이 무용지물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Universityof British Columbia 교환 교수가 되었을 때,

University of North Texas 교환 교수가 되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끝까지 가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


그러니 이제야 말할 수 있다.

멈추지 않길, 정말 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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