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말로 포장된 나

데리다의 해체 철학과 불편한 칭찬에 대하여

by 김지향

“나는 중심에 도달할 수 없고, 의미는 언제나 지연된다.”

—자크 데리다


“C양은 정말 친절해요. 항상 남을 먼저 챙기잖아요.”

“일할 때 보면, 늘 최선을 다하더라고요. 열정이 느껴져요.”

“자기보다 조직을 먼저 고려하는 분 같아요.”


회사에서 C양에 대한 평가는 늘 좋았다.

칭찬이 쏟아지는 회식 자리,

상사가 ‘이 시대의 모범 직원’이라며 엄지를 들어 보일 때

C양은 겉으로는 웃었지만, 마음 한편에선 왠지 씁쓸한

감정이 꿈틀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게 정말 나일까?’

혼자 엘리베이터를 탈 때, 거울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내가 친절하다고 하고, 배려심 깊다고 한다.

물론 틀리진 않다.

다만, 그 말들이 때론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그건 마치 포장지 같은 말이었다.

보기엔 반짝이지만, 열어 보면 마치 텅 빈 껍데기만 있는

듯했다.


데리다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우리는 많은 시간을 타인의 말로 구성된 자아로 살아간다.

칭찬도, 호칭도, 기대도—모두 외부에서 던져진 언어다.

그 말들은 나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 안에 빈틈을 만든다.

그 틈, 그 공백과 흔들림이야말로 해체의 시작점이다.


C양은 어느 날 퇴근길에,

메신저 대화창을 열어 자신이 썼던 말들을 훑어보았다.

“제가 할게요.”

“걱정 마세요.”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익숙한 문장들이지만, 정작 마음속에선 한 마디도 나를

묘사하지 않고 있다.

‘괜찮다’는 말은 왜 늘, 나를 괴롭히는가.


데리다는 말한다.

“의미는 언제나 지연되고, 중심은 부재한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내가 타인의 언어로만 설명될 때, 나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칭찬이 어색한 이유는, 그것이 ‘좋은 말’ 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속에는 나의 의견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C양은 일기장에 적어보았다.


“나는 때때로 누군가의 기대를 연기한다.”

“내가 친절한 사람이길 바라는 얼굴을 걸친다.”

“진짜 나는, 불친절하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그 문장들이 처음으로 자기 말처럼 느껴졌다.

조금 어색하고, 조심스럽고, 날이 서 있었지만

그 안엔 익숙하지 않아서 오히려 진짜 같았던 나가 있었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언어 속에서 만들어진다.

좋은 평가, 친절한 이미지, 안정된 역할…

그러나 그 언어들은 늘 우리보다 앞서 있고,

때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지연시키고, 심지어 감추고 있다.


데리다의 해체는 이렇게 시작된다.

의심에서, 균열에서, 그 불편한 감정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역시,

그 말들 사이에서 조용히,

나를 다시 써 내려가야 한다.


여러분은 어떤 말이 ‘칭찬’인데도,

왠지 낯설고 불편했던 적이 있었나요?

그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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