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옵티콘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우리

푸코의 눈으로 본 셀피 시대의 나

by 김지향


“시선은 권력이다. 누가 보고 있든, 누가 보고 있지 않든,

우리는 그 시선을 가정하고 행동한다.” — 미셸 푸코


C양은 매일 아침 전쟁을 치른다.


아이섀도우의 펄이 너무 튀지는 않나,

셔츠 단추를 하나 정도는 풀까 말까,

회의에서 말할 분량을 머릿속으로 리허설하며 거울 앞에서 한 번 웃어본다.


출근길 카페에서는 늘 하던 루틴처럼 커피 사진을 찍는다.

컵의 각도를 S 로고가 보이게 살짝 틀고,

손목에는 시계가 보이도록.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이미지를 위해,

매일 그녀는 순간의 생활을 기획한다.


“요즘엔 내가 나를 너무 의식해요.

회사에서도, SNS에서도…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어느 날 C 양이 고백하듯 말한다.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누군가의 시선을

상상하게 되죠?”


푸코는 이를 ‘감시의 내면화’라고 불렀다.

그가 제시한 개념 중 가장 잘 알려진 바로

‘판옵티콘(Panopticon)’이다.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벤담이 고안한 감옥 구조에서 비롯된 이 개념은, 중앙 감시탑에서 죄수들을 360도 감시할 수 있게 설계된 구조를 말한다.

그러나 이 구조의 핵심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일 수 있다는 초조함’이다.


감시자가 실제로 감시하지 않아도,

죄수는 감시당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 믿음이 죄수를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말한다. “권력은 외부에서 명령하지 않는다.

내면으로 스며들어, 나를 내가 통제하게 만든다.”


이제 감옥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정교한 자기 감시 체계가 일상 속에 들어왔다.


거울을 보는 눈빛, 회의 중 마주치는 시선,

셀피 카메라의 앵글, SNS 피드에 남긴 댓글 하나까지.


우리는 ‘보여지는 나’를 기획하고, 조정하고, 연기한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점은, 이 모든 과정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C양은 어느 날, 회식이 끝난 뒤 혼자 집에 돌아와 문득

거울 앞에서 멈췄다.

하이힐을 벗고, 립스틱을 지우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에야 —

“내가 오늘 누구였지?”

그녀는 자신이 회사에서 웃던 표정, 피드에 올린 문장들,

댓글에 눌렀던 이모지들을 떠올리며

하루 종일 무대 위에서 연기한 배우처럼 느껴졌다.


‘관객’이 있는지도 모르겠는 무대,

‘스크립트’가 보이지 않는 연극.

그러나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조명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


비로소 그녀는 깨닫는다.

이 연극의 연출자도, 조명도, 관객도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푸코는 말한다.

“감시는 처벌이 아닌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를 연출하고,

SNS 속에서 ‘일상의 알리바이’를 만들며

‘내가 존재한다’는 증명을 위해 ‘드러남‘을 택한다.


이 시대의 감시자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의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

그리고 거울 앞에서 표정을 점검하는 당신의 눈동자 안에

있다.


감옥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감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감시탑은 없지만, 우리는 스스로 감시탑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고, 연기하고, 교정한다.


‘누가 보고 있다’는 상상의 시선은,

결국 우리가 만든 또 다른 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감시하는 나와, 연기하는 나 사이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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