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하지 않는 영혼, 산티아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으며,
84일이 지나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패배하지 않는 영혼, 산티아고노인은 고기를 낚지 못해도
매일 같은 바다로 나가고, 매일 같은 방식으로 그물을 내린다. 무려 84일을 똑같이 살아가는 그 고독한 반복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끈기의 상징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삶에 대해 품고 있던 모든 인식을
가장 단정하고도 강건한 문장으로 응축한 걸작이며,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예술적 정의다.
산티아고는 85일째 되는 날에도 어김없이 바다로 나아간다. 기적은 그날 찾아온다.
그는 거대한 청새치를 낚아채고 사투를 벌인다.
작중 묘사에 따르면, 이 청새치는 약 700킬로그램에 달한다. 이는 고등어 2,000마리를 합친 크기이며,
다 자란 말 한 마리의 몸무게와 맞먹는다.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고기, 너무 깊은 바다,
너무 외로운 싸움이었다. 낚싯대를 대신한 밧줄을 손으로
직접 잡고 하루를 넘기고, 팔에 감고 밤을 견디며,
청새치와의 힘겨루기를 이틀 이상 이어간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이건 너무 가혹하다”는 탄식조차 없이,
그는 오직 자기 앞의 싸움에만 집중한다.
외로움과 탈진, 고통과 갈증 속에서도 그는 말한다.
“사람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야.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따라붙는다.
그들은 청새치의 몸을 뜯어가며 노인을 더욱 고립시키고
초라하게 만든다. 그래도 그는 말한다.
“없는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고,
있는 것을 가지고 무얼 할지를 생각할 때야.”
이 한 문장은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진 것이 무엇이든,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를 상징한다.
놀라운 점은, 산티아고는 이 힘겨운 싸움을 거의 혼잣말로
이어간다는 것이다.
“힘들지만 내가 택한 일이야.”,
“나는 이제 이 녀석을 존경하기까지 한다구.“
이런 짧은 문장 속에서 우리는 한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얼마나 단단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 채 해안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거대한 청새치의 뼈대를 보며 감탄하지만,
노인의 손은 피투성이고 몸은 지쳐 있다.
그는 마을로 돌아와, 매일같이 그러했듯 묵묵히 배의 돛대를 짊어지고 집으로 향한다.
이 장면은 기이할 정도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85일째의 싸움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일상처럼 되풀이한다.
지친 몸으로 그는 다시 돛대를 짊어진다.
이것은 인생을 버티는 기둥이며, 그가 존재하는 방식의
은유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그는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너무도 짧지만,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위대한 선언이다.
그것은 삶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꿈이며,
고통을 경험한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순수한 자유다.
어린 시절 보았던 아프리카의 사자들, 그 힘차고도
자유로웠던 풍경을 노인은 다시 떠올린다.
그것은 다시 바다로 나아갈 것임을 암시하며,
동시에 노인이 이미 패배를 넘어섰음을 알려준다.
사자 꿈을 꾸는 노인은 여전히 꿈꾸는 자이고,
싸우는 자이며, 살아 있는 자다.
헤밍웨이 역시 산티아고처럼 매일 새벽 일어나 글을 썼다.
“가능하면 해가 뜨자마자 글을 씁니다. 방해할 사람도 없고 날은 서늘하거나 춥고, 와서 글을 쓰다 보면 몸이 더워지죠.” 작가의 삶과 인물의 삶이 나란히 닮아 있다.
『노인과 바다』는 단지 한 어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싸움의 철학이자, 반복의 미학이며, 절망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존재의 위엄이다.
이토록 단순한 이야기로,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와 산티아고는 어쩌면 같은 사람이다.